이번 WBC에서 한국은 3월 6일에 대만과 예선 첫 경기를 가졌습니다. 라이벌 일본은 하루 앞선 5일에 중국과 경기를 가졌죠. 그리고 나란히 승리한 두 팀은 7일 승자전에서 맞붙었고 한국이 14:2라는 큰 점수 차로 잊고 싶은 콜드게임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휴식 없이 곧바로 다음날 경기를 치른 한국과 하루의 휴식을 취한 일본의 차이가 드러난 경기였죠. 아무리 야구가 매일할 수 있는 스포츠라지만, WBC와 같은 단기전에서 하루의 여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큰 이점이라 할 수 있으니까요.
특히 이번 WBC에는 30구 이상을 던지거나 이틀 연속 등판한 투수는 무조건 하루 휴식을 취해야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또한, 한국과 일본이 속한 A조를 제외한 나머지 B,C,D조의 1차전은 모두 같은 날에 경기가 열리도록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A조의 일정만 유독 특이(?)한 것이었죠.
물론 미리 막지 못한 상황에서 그러한 일정을 패배에 대한 핑계로 삼아서는 안 되며, 특별히 하루 휴식을 취한 일본의 투수들의 활약 때문에 한국이 패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닌 것도 확실합니다.
이에 대해 한국 프로야구 선수협은 WBC 조직위원회 측에 공식적으로 항의를 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올바른 결정이지요.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또 한 가지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바로 본선 2라운드에서의 일정인데요.
당초 2라운드 1조의 경기는 A조 1위와 B조 2위가 현지시간으로 15일 오후 1시에 경기를 치르고, 그로부터 7시간 후인 오후 8시에 A조 2위와 B조 1위가 경기를 하도록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지난 2월 22일에 포스팅한 “제2회 WBC 전체 경기 일정”이라는 글에서도 알 수 있지요.(제가 직접 WBC 홈페이지를 확인하고 국내시간으로 바꾸어서 만든 일정표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갑작스레 바뀌었습니다. 첫 경기와 두 번째 경기의 일정이 서로 뒤바뀐 것이죠. A조 1위를 차지한 우리나라는 오후 1시가 아니라 8시에 경기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한국시간으로는 16일 낮 12시네요. 원래라면 새벽 5시였을 경기가 12시가 되었으니, 보는 입장에서는 한결 편하게 되었습니다. ◇ 바뀐 후의 본선 1조 경기 일정
그렇지만 이렇게 일정이 바뀐 것 자체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언론들은 일본이 승자전에서 승리한 직후에 바뀐 것이라며, A조 1위가 유력해진 일본이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로비를 해서 바꾼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사실과 조금 다른 듯합니다.
모 국내 야구 커뮤니티에서 제시한 캡쳐화면을 보면, 3월 3일에 이미 경기 일정은 바뀌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제가 포스팅 한 2월 22일과 대회가 시작되기 전인 3월 3일 사이에 어떠한 이유로 경기 일정이 뒤바뀐 것이죠.
이를 두고 일부 야구팬들은 ‘멋모르는 기자들이 반일감정을 부추기고 있다’라며 비난하고 있기도 한데요. 꼭 그런 차원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일정 변경이 일본과 전혀 관계없다고 볼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일본이 승자전에서 승리한 후에 로비를 해서 일정을 바꾼 것은 아닐지 몰라도, 사전에 조 1위를 예상하고 미리 일정 조정을 의뢰했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것은 A조의 경기 일정의 불공평함 등을 놓고 봤을 때 충분히 가능한 추리입니다. 게다가 우리와 무관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정 변경 후에도 우리나라에는 아무런 사전 통보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야구라는 스포츠의 특성상 낮 1시 보다는 저녁 8시가 경기를 치르기에 훨씬 편합니다. 게다가 자국에서도 새벽 5시보다는 낮 12시가 경기를 시청하기에 훨씬 용이하죠. 이번 대회의 최대 스폰서인 일본이 모종의 작업을 통해 본선 1조의 경기 시간을 바꿨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일본의 압력으로 인해 본선 일정이 바뀐 것이라면, 그들은 ‘죽 쒀서 남 준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으로서는 조 1위를 자신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는지 몰라도, 우리나라가 순위결정전에서 보기 좋게 일본에 승리하는 바람에, 뒤바뀐 경기 일정에 대한 모든 혜택은 우리나라가 가지게 되었으니까요.
예상치 못한 또 하나의 행운이라고 할까요? 덕분에 우리 대표팀은 선선한 저녁에 경기를 펼치게 되었고, 국민들은 낮 12시에 점심시간을 활용하여 WBC를 시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시아예선이랄 수 있는 A조는 그렇다 치고, B조에도 올스타급 메이저리거가 득실거리는 도미니카, 푸에르토리코, 베네수엘라, 캐나다 등의 팀은 모두 빠져 있습니다. 대신 쿠바와 멕시코가 포함되어 있죠. 개인적으로는 이 또한 스폰서를 자청한 일본에 대한 조직위원회의 ‘예우’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여기에서도 한국은 약간의 어부지리를 얻고 있는 셈이지요. 제1회 대회에서도 그랬지만, 우리나라는 일본과 한 조라는 이유 때문에 사실 꽤나 많은 이득을 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이득’과 ‘행운’은 일본을 꺾었기 때문에 뒤따랐던 것이니,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죠.
하지만 WBC의 일정과 경기 진행 방식에는 여전히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선의 조 1,2위가 본선에서 또 다시 같은 조에 편성되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러한 예고 없는 일정 변경까지. 이래가지고야 모든 이들에게 ‘권위 있는 세계 최고의 야구 축제’라고 당당하게 내세울 수나 있겠습니까.
야구를 좋아하고, 또한 이 유일무이한 ‘메이저리거가 참가하는 세계 대회’가 존속되기를 바라는 저로서는 이러한 일들이 WBC가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성장통’이길 바라고 있습니다. 2013년에 열리는 3회 대회 때는 지금보다 좀 더 발전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지요.
하지만 당장 눈앞의 불합리함에서 느껴지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구를 아끼고 사랑하는 저는 WBC가 언젠가 월드컵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인의 축제’가 될 것이라 기대해 봅니다. 어쩌면 그것은 ‘세월’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 김홍석(http://mlbspecia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