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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 Sports

국내 스포츠 언론은 ‘대변인 저널리즘’

by 카이져 김홍석 2009. 5. 1.

지난 월요일 밤, 미디어 토씨의 김종배 기자님과 우연찮게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축구팬이라고 밝히신 김종배 기자님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의 직업이 그렇다보니 저널리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그러던 중 ‘한국 스포츠 언론의 특징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한동안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은 한 가지.

“국내의 스포츠 언론은 ‘대변인 저널리즘’이다.”

라는 것이었다.


▷ 박지성을 대변해주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이 3경기 연속 결장을 했다. 한국 언론은 그에 대한 원인 분석을 하기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굳이 원인을 찾을 이유가 있을까? 사실 쉽게 생각하면 박지성이 빠진 이유는 굉장히 간단하다.

부상이 아니라면 그가 결장한 원인은 포지션을 놓고 경쟁하고 있는 선수들에 비해 기량이 부족하거나 체력적인 부담을 안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박지성이 실력과 체력으로 문제가 없다면, 쉽게 말해 동료 선수들보다 뛰어나다면 퍼거슨 감독이 그를 기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국내의 언론은 박지성이 경기에 빠지기만 하면 또 다른 원인을 찾아내기에 여념이 없다.

처음 경기에 결장하면, 체력 분배 차원이라 말한다. 두 번 연속 결장하면 다음에 더욱 중요한 시합이 있기 때문에 박지성을 높게 평가하는 퍼거슨이 핵심 전력인 그를 아낀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게 세 번째까지 이어지자 할 말이 없어졌나보다. 결국 그들은 퍼거슨 감독에게 화살을 돌리기 시작한다. ‘괜한 립 서비스 때문에 우리가 피해를 보고 있다’는 식이다.

선수기용에 관한 모든 권한은 감독에게 있으며, 그것을 언론 플레이로 활용하여 상대방을 속이기도 하는 것은 프로 무대에서 매우 상식적인 일이다. 퍼거슨 감독이 잘못한 것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가 박지성을 기용하지 않은 것은 ‘이 경기에서는 박지성이 필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판단은 그러한 결정이 패착이 되어 경기에서의 패배로 드러나지 않는 한 비난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 이승엽을 위해 변명하고...

축구에서는 박지성이라면 야구에서는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고 있는 이승엽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승엽은 날아다니던 시범경기와는 달리 막상 정규시즌이 시작되자 심각한 부진에 빠져 있다. 이승엽이 부진한 원인은 쉽게 찾기 어렵다. 단지 지금 당장의 컨디션이 나빠서일 수도 있으며, 타격 자세 등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가 부진한 것은 그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언론은 계속해서 이에 대한 원인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만만한 상대는 감독이다. 하라 감독의 플래툰 시스템을 문제 삼아 들고 나온 것이다.

플래툰 시스템은 비슷한 수준의 좌-우 두 타자를 두고 상대 선발투수가 좌완이면 오른손 타자를, 우완이면 왼손 타자를 기용하는 방식이다. 야구는 투수와 타자가 서로 사용하는 손이 다를 때 타자 쪽에 우위가 있으며, 바로 이것을 활용하는 방식이 플래툰 시스템이다.

국내 스포츠 언론은 이것이 이승엽이 부진한 원인이라 지적하고 있다. “플래툰 시스템 때문에 이승엽이 컨디션을 잡기 어렵다”는 것이 그 주된 논조다. 간단히 말해 이는 ‘말도 안되는 억지’에 불과하다.

앞서 말했듯이 플래툰 시스템은 ‘타자에게 유리한 투수만 상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독특한 시스템이다. 이승엽도 여느 좌타자와 다를 바 없이 좌투수를 상대로는 약점을 보인다. 하지만 이승엽은 올 시즌 좌투수를 상대할 일이 별로 없다. 즉, 플래툰 시스템이란 타자가 원래 가지고 있는 성적 이상의 것을 끌어내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플래툰 시스템 때문에 리듬을 잃은 이승엽이 손해를 보고 있다’는 말 보다 ‘플래툰 시스템에서조차 좋은 성적을 못 내는 선수는 붙박이 주전이 될 자격이 없다’는 말이 훨씬 더 설득력 있다. 이승엽의 부진을 플래툰 시스템 탓으로 돌리는 것은, 그의 부진에 대한 원인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 ‘남 탓’하는 언론, 혹시 팬들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

이렇게 국내 스포츠 언론이 툭하면 우리나라 선수들의 부진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이유가 뭘까. 어쩌면 그 이유는 독자, 즉 팬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팬들은 박지성의 결장이 ‘실력부족’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다른 외부적인 원인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누군가는 그러한 점을 설명해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승엽을 바라보고 있는 일부 야구팬들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게 된다”는 말이 있다. 이승엽이 부진한 원인을 ‘실력부족’에서 찾는 기사를 보면 “아시아 홈런왕에게 그 무슨 소리냐?”고 반박하면서도, 감독 탓으로 돌리는 기사를 보고 나면 “그럼 그렇지, 그런 이유가 없고서야 이승엽이 이토록 부진할 리가 없지. 하라 이 나쁜 놈!!”식의 반응을 보이며 동조한다.

이러한 변명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종범이 일본에서 실패한 이유는 초창기 잘 나가던 시절 몸에 맞는 공으로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고, 많은 축구 선수들이 유럽 무대에서 실패하는 이유도 ‘실력 부족’이 아니라 ‘적응에 애를 먹어서’이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경기에서 진 것은 ‘심판의 편파판정 탓’이며, 내가 좋아하는 선수가 경기에 못 나오면 그것은 감독이 그 선수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절대로 '실력부족'은 아니다.

팬들은 끊임없이 누군가가 자신을 위로해주길 바라고 있으며, 그에 충실하게 반응하는 언론은 ‘대변인 저널리즘’으로서 팬들을 만족시킬만한 기사를 생산해내기에 바쁘다. 누군가가 박지성이 부진한 원인을 두고 ‘실력부족 때문’이라며 직설적인 기사를 쓰기라도 하면, 악플의 홍수에 휩쓸려 버린다. 팬들은 그런 기사를 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언론은 ‘객관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대중이 바라는 ‘객관성 있는 기사’는 ‘사실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중들은 ‘자기 입맛에 맞는 기사’ 혹은 ‘자기를 만족시켜주고 위로해주는 기사’를 ‘객관성 있는 기사’ 또는 ‘좋은 기사’라고 평가한다. 언론은 결국 그러한 기사를 생산해 내고 그걸로 인기를 얻는다.

팬들, 그리고 대중이 원하는 진정한 ‘객관성’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이 과연 스포츠 언론에서 제대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일까. 한 쪽은 끊임없이 변명해주길 바라고 있고, 다른 한 편은 거기에 충실히 부응하며 일시적인 인기를 얻는 이상한 관계.

이 ‘대변인 저널리즘’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건 언론이든 블로거든 그 스스로의 함정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를 두고 항상 ‘오냐오냐’하는 것은 그 아이를 망치는 지름길이며,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남 탓’으로 돌리는 부모 슬하에 자란 아이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하다.

우리나라의 스포츠 팬들과 스포츠 언론이 이러한 함정에 이미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조금은 쿨하게 선수의 실력부족을 인정하거나, 부진의 원인이 해당 선수에게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떨까.

‘대변인 저널리즘’은 팬과 언론을 동시에 망치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