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유진의 꽃 보다 야구

[인터뷰] MBC청룡 1번 타자, 김인식을 만나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5. 7.

안양 충훈고등학교는 2007년 10월 15일, 학교 자체 예산에 안양시 야구협회와 동창회, 안양시 예산을 보태 야구부를 창단했다. 창단 초기에는 투수 1명으로 팀을 운영할 만큼 열악한 선수층이 문제였다. 그나마 성남서고, 주엽고 등 해체된 야구부에서 선수들이 충훈고를 찾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충훈고등학교 야구부를 ‘외인구단’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충훈고등학교 야구부는 다른 야구부와는 다른 출발선상에 있었다. 즉, ‘너희(선수)들은 야구 선수이기에 앞서 학생이다’라는 마음가짐을 심어주는 것부터 시작한 것이다. 이형진 안양야구협회장 역시 “아이들은 학생 신분으로 야구하는 것이다. 즉 선수 이전에 학생이다. 그래서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야 하고, 선수들로 하여금 동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

그래서 이형진 회장은 MBC 청룡 원년 멤버였던 김인식(56) 前 LG 트윈스 2군 감독을 충훈고 감독으로 강력 추천했다. 야구계에서 청렴 결백한 인사로 그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에 김인식 감독도 선수들에게 ‘큰소리’를 치기 보다는 ‘잘한다’는 이야기부터 먼저 한다. 그리고 기술적인 문제는 원리부터 알려주기 위해 애를 쓴다. ‘무조건 A로 치지 말아라’라는 말이 아닌, ‘이렇게 치면 B라는 어려운 점이 있어서 힘들다. 그런데 저렇게 치면 B라는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방법은 선수들의 빠른 이해를 돕는다고 한다.

MBC 원년 1번 타자이자 ‘몸에 맞는 볼’의 달인이기도 했던 ‘패기’의 김인식. 안양시장기 지역대회에 참가 중인 충훈고등학교 선수들 사이에서 그를 어렵지 않게 만달 수 있었다.


Part 1. 현역시절

Q :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먼저 ‘MBC 청룡 원년 멤버 김인식’을 기억하고 있는 야구 팬 여러분들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인식 감독(이하 ‘김’으로 표기) : ‘김인식’ 이라는 감독을 기억 못하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매번 매스컴에 나오잖아요. ‘국민감독 김인식’으로요(웃음). 그 분이 있기에 제 이름은 가만히 있어도 TV나 스포츠 뉴스에 항상 나오지요. 그런데 한화 이글스 김인식 감독님은 ‘호랑이 인(寅)’자를 쓰시고 저는 ‘어질 인(仁)’자를 씁니다. 그래도 지금 LG 트윈스 팬 여러분들 께서는 저를 잊지 않고 계시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 참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데 LG가 작년까지만 해도 성적이 좋지 않아서 팬들께서 야구장을 많이 찾지 않으신 것으로 압니다. 일단 스포츠에서는 이겨야 하는데, 성적 문제도 있었지만 서울 라이벌 두산에게 자주 패하는 모습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서울에서 야구를 하면 많은 팬들을 확보할 수 있으니, LG 선수들이 잘 해 주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예전 MBC/LG에 몸담았던 선수들도 기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저도 MBC/LG 선수 출신이기에 앞서 ‘영원한 LG팬’이 되어 끝까지 응원하고 싶습니다.

Q : 원년 MBC 청룡 시절 이야기를 좀 해 보겠습니다. 개막전 1번 타자로 나오셨는데, 그때 추억을 잠깐 말씀해 주십시오.

김 : 어휴, 그때는 (분위기가) 정말 삼엄하고 살벌했습니다. 왜냐하면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직접 시구도 하고, 사법 경찰들도 서울 운동장(동대문 운동장)에 배치되어 있었지요. 그런데 프로야구라는 것이 탄생은 했지만, 아마야구가 그대로 프로로 옮겨 온 것이라 ‘세미프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원년) 개막전 한 것이 벌써 28년 전 일이네요(웃음). 우리나라에 프로가 탄생하여 선수 전원이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프로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본 프로야구 경험이 풍부하신 백인천 감독님께서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 시절이 그립고 생각이 나네요. 지금 후배 선수들이 그 정도로 한다고 하면, 더 좋은 기량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 삼성과의 개막전 마지막 장면이 생각나는데, 그때가 1, 3루 상황이었지요? 그때 김 감독님께서 3루 주자셨는데?

김 : 그때 쓰리 볼 상황에서 유승안(현 경찰야구단 감독. 당시 4번 타자 겸 포수) 선수가 친 것이 투수 앞 땅볼이 됐지요. 이선희 투수가 어렵게 잡아서 홈에 던졌는데, 그것으로 끝이었지요. 3루로 돌진하던 제가 아웃됐습니다. 삼성에서는 어쩌겠어요? 5번 타자로 나온 백인천 감독님을 고의 사구로 거를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참.... 이종도(개막전 6번 타자) 형이 경기를 끝내는 만루 홈런을 기록했는데 그때 기억이 참 생생합니다. 제가 아마 마지막 타석 때 몸에 맞는 볼로 출루했을 겁니다.

Q : ‘몸에 맞는 볼’이야기가 나와서 드리는 말씀인데, 김 감독님은 정말로 ‘몸에 맞는 볼’의 달인이셨습니다. 롯데 공필성 코치가 선수 시절 몸에 맞는 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그 원조는 김 감독님이 맞는 것 같습니다.

김 : 저도 맞으면 아프지요. 그런데 팀의 1번 타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루상에 진루를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공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남들은 맞는다고 하는데 사실은 저도 공을 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몸을 안 사린다, 악바리다’라고 기자분들이 많이 써 주셨는데, 이거 정말 아픕니다(웃음). 제 나이가 이제 50대 중반을 넘어섰는데, 비만 오면 (예전에 자주 맞았던 부분이) 엄청 아프지요. 생각해 보면 감회가 깊습니다. 열심히들 했습니다.

그런데 저 외에도 이만수 선수가 (볼에) 많이 맞았습니다. 자신이 잘 치면 투수들을 약올리는 세레모니를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다음 타석에 들어서면 이만수에게 몸에 맞는 볼을 던졌지요(웃음).

Q : 감독님을 이야기 할 때 항상 나오는 기록이 바로 ‘연속경기 출장 기록’이 아닌가 싶습니다. 비록 김형석(前 두산 베어스), 최태원(前 SK 와이번스) 등 후배들이 이 기록을 갈아치우긴 했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깨기 어렵다는 606경기 연속출장 기록을 세우셨습니다. ‘원조 철인’ 아닙니까?

김 : 원년부터 시작해서 1987년에 연속경기출장 기록이 중단됐습니다. 그런데 당시 오래 하려고 하면 쉬는 날도 있어야 했고 또 나중에는 그만 두어야 했는데, 기록 때문에 무리해서 출전한 경기도 적지 않았습니다. 실력도, 몸도, 컨디션도 안 좋은데 계속 출전한 것이 팀에게도, 본인에게도 손해였습니다. 이제 와서 이야기지만, 나이 서른에 프로가 출범해서 7년간 이를 악 물고 한 결과가 연속 경기 출장 기록으로 이어질 수 있었지요. 후에 김형석, 최태원 선수가 그 기록을 깼지만 달성하기 힘든 기록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Part 2. 은퇴, 그리고....

Q : 1987년 이후 일선에서 물러나실 준비를 하셨습니다.

김 : 제가 1988년 올림픽할 때 은퇴를 했습니다. 그런데 선수가 부족하다 보니 플레잉 코치로 잠시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89년에 2년 계약으로 코치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990년도에 LG가 MBC를 인수하면서 그때 다시 1년 계약을 했습니다. 이후 주욱 LG에서 2군 감독, 수석 코치 3번을 하고 2001년도에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2002년도에 일본 주니치에 있다가 2005년 10월에 다시 LG로 복귀했습니다. 이후 김재박 감독 부임과 함께 충훈고등학교로 적을 옮겼습니다.

Q : 현역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으시다면요?

김 : 잠실에서 청보 핀토스와의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기록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게 프로 최초였지요. 펜스를 안 줄였는데도 그게 그대로 넘어갔습니다. 그게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Q : 프로 원년을 포함하여 LG 트윈스에서 정말 오랫동안 몸담으셨습니다. 그런데 선수시절과는 다른, 코치/감독으로서의 고충이 있으셨을 텐데?

감 : 선수시절 때에는 자기만 열심히 하고, 꼭 필요한 선수가 되고 또 팀을 위해 뛰면 그만이었지요. 하지만 코치가 되면 이론적으로도 많이 알아야 하고, 또 이것을 경험적인 요소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구단에서 해외 연수 등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제공했습니다. 최정우 코치 등과 참 열심히 공무했지요. 그래서 어디 나가도 자신감 있게 지도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역시 공부를 해야 선수들을 체계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먹구구식으로, 자기 경험만으로 지도하는 방식은 이제 통하지 않거든요. 

▲ 배팅 연습을 하고 있는 제자들을 지켜보는 김인식 감독. 그는 선수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주어야 한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학생야구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다.

Q : 이제 고교야구를 지도하는 감독직을 맡게 되셨는데, 안양시 야구협회에서 감독님을 직접 추대하는 방식을 취했다고 들었습니다.

김 : 충훈고등학교가 우수 고등학교로 선정된 이후 안양시에서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안양은 축구의 도시거든요. 다행히 이형진 안양시 야구협회장께서 아마야구선수 출신(배재고 3루수)이라 안양시와 협의해서 석수구장을 먼저 만들고 야구부를 창단했거든요. 제가 보기에 그 분은 안양 야구를 ‘공부하는 학생야구’로 만들기 위해 저를 초빙한 것 같습니다. 학생이 공부를 하면서 가장 추억에 남는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에 저도 생각을 같이 했습니다.

Q : 그럼 안양 충훈고등학교 야구부 자랑을 좀 해 주십시오.

김 : 선수들이 하고자 하는 의욕은 강한데, 기량은 좀 부족합니다. 하지만 열심히 한다는 점은 칭찬해 주고 싶어요. 그렇지만, 조금 어려운 점이 있으면 누구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못내 안타깝습니다.

Q : 그렇다면 지금 학생야구에서 가장 힘드신 점이 있으시다면요?

김 : 아마야구 저변확대를 위해서 열의 있는 야구인들이 지원을 많이 해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신생팀이라 어려운 점도 많고요. 그런데 야구를 할 수 있는 운동장을 포함해서 여러 시스템을 프로에만 신경쓰지 말고 아마추어 야구에도 신경을 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아마야구가 프로에도 좋은 선수를 보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Q : 지난 겨울에 대만으로 전지훈련을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김 : 대만 야구수준이 정말 높습니다. 저희가 전국대회 1위를 차지한 난명 고등학교와 경기를 했는데, 어이구야... 그 학교 야구부원이 90명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첫 날 경기에서는 25-1로 패하고, 그 다음 날 경기에서는 16-0으로 패했지요. 마지막 경기에서 3-0으로 패한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습니다(웃음). 그런데 그 학교가 뉴욕 양키스의 왕치엔밍이 나온 학교더군요. 그 선수들의 첫 번째 꿈이 메이저리그, 두 번째가 일본 프로야구, 마지막이 자국리그라고 합니다. 그게 안 되면 아예 야구를 그만둔다고 하더군요. 야구 수준이 상당히 수준이 높아 많이 배우고 왔습니다.

Q : 마지막으로 후배 선수들과 제자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십시오.

김 : 우리 후배 선수들은 대단한 겁니다. 뭐가 대단하냐면 저희 때에는 (세계 대회에서) 기껏해야 준우승 밖에 못했거든요. 그런데 베이징 올림픽 우승이라는 성과는 보통 노력으로 이루어 낸 것이 아닙니다.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 메이저리거들과 싸워 이겼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 후배들이 겸허한 자세를 갖게 되었으면 합니다. 야구를 위해서 프로까지 갔다면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받은 만큼 무언가 야구인 후배들에게 돌려줄 수 있는, 자랑스러운 후배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김인식(金仁植)은 누구?
한화 이글스 김인식(金寅植)감독과 동명 이인인 충훈고 김인식 감독은 1982년 MBC 청룡 멤버이자 개막전 1번 타자였다. 공필성 롯데 코치 이전, '몸에 맞는 볼'의 달인으로 더욱 유명하기도 했다.

개막 이후 1987년도까지 쉼 없이 606 연속경기 출장기록을 보유하며 '원조 철인'으로 불렸으며, 프로 7년 통산 성적은 타율 0.255, 553안타, 11홈런, 153타점, 99도루를 기록했다. 1988년 은퇴 이후 MBC 코치, LG트윈스 수비 코치, 2군 감독 등을 거쳐 2007년 부터 안양시에서 새로 창단한 충훈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고 있다.

// 유진(http://mlbspecia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