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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의 꽃 보다 야구

'빅 유닛' 랜디 존슨, 그가 300승을 거두기까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6. 6.

긴머리와 콧수염, 언제든 타자를 '잡아 먹을 듯한' 험한 인상의 주인공. 2m가 넘는 장신에서 내리꽂는 100마일에 육박하는 라이징 페스트볼과 140km대의 고속 슬라이더. 거대한 기계에 비유되는 닉 네임 빅 유닛(Big Unit). 바로 랜디 존슨(Randy Johnson)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단어'들이다.

마흔 하나의 나이에 퍼펙트 게임 기록을 수립하고, 마흔 여섯의 나이에도 여전히 선발 마운드에서 힘차게 공을 뿌린 그는 한국시간으로 5일, 워싱턴 네셔널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개인 통산 300승을 기록했다. 30년간 꾸준히 10승을 기록해야 가능하다는 300승 고지는 메이저리그에서 존슨을 포함하여 단 24명만 밟아보았던 '신의 영역'이기도 하다. 1988년 몬트리올 엑스포스(현 워싱턴 네셔널스)에서 데뷔한 이후 22년 만에 거둔 값진 성과였다.

고교 졸업 이후에는 '새가슴 좌완투수'로 평가받아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특A급' 투수 반열에 올랐던 것은 아니었다. 1982년,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은 그를 향하여 '204cm, 94kg의 체격 조건을 갖춘 새가슴 좌완투수'라는 혹평을 서슴치 않았다. 그만큼 '배짱 있는 투구'가 아쉬웠던 선수였다. 마운드를 호령하는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대비된다.

유밍주와는 거리가 먼 그였지만, 고교 졸업 이후 아마추어 드래프트에서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에 지명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프로행을 포기하고 남가주 주립 대학(USC)으로 진학했다. '홈런왕' 마크 맥과이어와 대학 동창이기도 했다.

대학 입학 이후 당시까지만 해도 투수였던 맥과이어와 '미완의 대기' 존슨은 에이스 경쟁을 펼쳤다. 그러나 그의 투구를 지켜 보았던 맥과이어는 "투수로는 내가 메이저리그에서 존슨에게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말을 남긴 채 타자로 완전히 전향을 했다. 대학 시절 그를 만났던 베리 본즈 또한 존슨의 '광속구'를 인정할 정도로 그는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새가슴 투수가 이제야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었던 셈이다.

이에 1985년에 다시 임한 아마추어 드래프트에서 몬트리올 엑스포스에 지명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가 빅리그 데뷔를 위해 필요했던 기간은 3년이었다. 마이너리그 수업을 받은 직후 1988년 시즌 막판에 메이저리그에 대뷔한 존슨은 4경기에 선발로 등판하며 3승, 방어율 2.42라는,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26이닝 동안 25개의 탈삼진을 솎아내며, 9이닝당 평균 8.6개를 기록하기도 했다. '닥터 K'의 서막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 존슨은 샌프란시스코 유니폼을 입고 커리어 통산 300승을 달성했다.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홈페이지 캡쳐

시애틀 시절에 만난 '놀란 라이언'과의 역사적인 조우

그러나 몬트리올은 당시 정상급 왼손투수였던 마크 랭스턴을 데려오기 위해 '미래의 닥터 K' 존슨을존슨을 시애틀 매리너스로 트레이드한다. 역시 제구력이 문제였다. 이닝 당 1개 꼴로 내어 준 볼넷 숫자에 몬트리올은 끝내 존슨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됐다.

그렇지만 이것이 오히려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성정하기 위한 촉진제가 되기도 했다. 이적 이후 존슨은 1990~92년 내내 10승 이상/3점대 방어율의 꾸준한 성적을 유지한 것을 비롯, 1990년 6월3일에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상대로 생애 첫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1992년에는 처음으로 탈삼진 타이틀을 획득했다. 물론 제구력 불안은 여전하여 이 기간 동안 '볼넷 1위 3연패'를 마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3시즌을 앞둔 스프링캠프에서 존슨은 전설의 '텍사스 특급' 놀란 라이언을 만나게 된다. 이 역사적인 사건이야말로 존슨의 야구인생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계기가 되고 만다.

둘이 마주한 시간은 고작 몇 시간에 불과했지만, 이후 그의 제구력과 자신감은 몰라지게 좋아지기 시작했고, 이 해 존슨은 19승 8패, 방어율 3.24라는 호성적을 기록하면서 생애 첫 300탈삼진을 돌파했다(탈삼진 308개). 특히, 볼넷수를 100개 미만으로 떨어뜨렸다는 사실이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이후 존슨은 두번 다시 세 자릿수 볼넷 숫자를 기록하지 않았다. 나이 서른을 기점으로 그의 야구인생이 180도 달라지게 된 샘이었다.

'나의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 '고집쟁이'

시애틀 시절, 그는 1996년을 제외하고 매년 10승 이상을 기록했다. 그리고 18승 2패, 방어율 2.48을 마크했던 1995년에는 생애 첫 사이영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제 남은 것은 '명예의 전당'을 향한 탄탄대로를 걷는 일 뿐이었다.

그러나 존슨은 경기장 내에서 굉장한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히 강하다. 1998년 시즌에는 그의 나이(당시 34살)를 부담스러워한 시애틀이 재계약에 머뭇거리자 그는 보란듯이(?) 태업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휴스턴 에스트로스와의 트레이드로 연결되었다.

트레이드 직전까지 9승 10패 방어율 4.33이라는, 존슨답지 않은 기록을 남긴 그는 휴스턴으로 이적하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그가 등판했던 11경기에서 10승 1패(완봉승 4회), 방어율 1.28을 기록하며 그 본 모습을 드러낸 존슨은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끌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디비전 시리즈에서 그는 혼자 2패를 당하며 지속적인 신임을 얻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그 해를 끝으로 다시 휴스턴을 나오며 FA를 선언했다.

포스트 시즌에서 다소 부진했지만, 존슨은 FA 시장의 거물이었다. 그를 영입하기 위하여 고향팀 애너하임 에인절스(현 LA 에인절스), LA 다저스 등이 뛰어들었지만, 100만불이라도 더 얹어 준 팀을 선택한 존슨의 거주지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였다(당시 계약 조건 : 4년간 5,300만 달러). '어디로 가든 나의 가치를 인정하는 곳만이 내가 있을 곳이다' 라고 말하는 그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포스트시즌 징크스와 양키스로의 외유

허나 애리조나에서의 첫해였던 99년, 존슨은 지독한 '득점 공황'에 시달렸다. 시즌 중반 34이닝 연속으로 1점의 득점지원도 받지 못하는 사이, 존슨은 세인트루이스 호세 히메네스에게 노히트노런을 포함한 2번의 1-0 패배를 당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서도 존슨은 17승9패 방어율 2.48의 성적을 올려 생애 두 번째로 사이영상을 수상했다. 페드로 마르티네스, 게일로드 페리에 이어 양대리그에서 모두 사이영상을 거머쥔 3호 선수가 되기도 했다.

이후 존슨은 2000년 시즌에 창단 2년차인 애리조나를 지구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뉴욕 메츠와의 디비전시리즈에서 다시 8⅓이닝 8실점으로 무너지는, 믿지못할 장면을 연출하며 '포스트시즌 징크스'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 징크스는 오래 가지 않았다. 양키스를 만난 2001년 월드시리즈에서 '창단 최소 년도'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커트 실링과 함께 월드시리즈 공동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월드시리즈 우승의 한을 푼 존슨은 사이영상 타이틀까지 거머쥐며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2002년까지 네셔널리그 사이영상 4연패를 마크하며, '전설의 완성'을 알리기도 했다.

그리고 41세의 나이에 16승을 마크한 존슨은 이 해에 생애 첫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2004년 5월 19일, 애틀란타 터너 필드에서 열린 원정 경기에서 상대 27타자를 모조리 범타/삼진으로 처리한 것. 최고령 퍼펙트 게임 기록을 갈아치우는 순간이기도 했다(종전 : 사이 영, 37세).

이후 존슨은 양키스의 끈질긴 구애를 받으며 뉴욕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오랜만에 돌아 온 아메리칸리그에서 존슨은 예전같지 않은 모습을 선보였다. 물론 2년간의 '뉴욕 외출'에서 년 평균 17승, 200이닝을 책임졌지만, 2점대 방어율이 5점대로 수직상승했던 것이 문제였다. 결국 그는 다시 애리조나 유니폼으로 갈아입으며,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불태우기도 했다.

2007 시즌, 10경기 등판에 그치며 선수 생활 은퇴를 선언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던 것도 잠시, 2008 시즌 그는 다시 10승 투수로 부활했다. 시즌 종료와 함께 그가 받아 든 성적은 11승 10패, 방어율 3.91. '존슨다운 성적'은 아니었지만, 45세의 선수가 낸 성적이라고는 믿기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300승을 향하여 또 다른 팀인 센프란시스코로 발걸음을 옮겼다.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생활도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퍼펙트 게임을 기록했던 41세 때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그는 꾸준히 선발로 등판하며 마침내 300승 고지를 밟았다.

▲ 300승을 달성 이후 아들과 포옹을 나누는 존슨.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홈페이지 캡쳐

끝나지 않는 도전

그러나 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의 도전이 300승에서 그치지 않을 것임을 말한 것이다. 통산 탈삼진 숫자에서 역대 2위에 랭크되어 있는 그는 6일 현재까지 4,845 탈삼진을 기록하고 있다. 5,000탈삼진이 욕심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현재까지 5,000탈삼진 고지를 점령한 투수는 놀란 라이언, 단 한 명 뿐이다. 그리고 이는 앞으로도 절대 깨어질 수 없는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존슨이라면 가능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그의 천부적인 탈삼진 제조 능력에 기대를 건다. 커리어 통산 4,097이닝을 기록중인 존슨은 이닝 당 평균 1.2개(9이닝 환산 10.6개)의 탈삼진을 잡아내고 있다.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꾸준한 체력 관리를 앞세운 그가 앞으로 165개 탈삼진을 추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 실제로도 실현 가능성이 높다.

몇몇 전문가들은 '존슨을 끝으로 더 이상 300승 투수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만큼 현대 야구에서 20승 이상을 꾸준히 기록해 줄 수 있는 S급 투수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와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라 이야기하는 이들도 많다.

'미완의 대기'에서 300승 투수로 탈바꿈했던 '전설' 랜디 존슨. 그의 선배인 놀란 라이언, 제시 오로스코 등이 46세 까지 선수생활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 하는 선수로 끝까지 마운드를 지켜주기를 기원한다.

// 유진(http://mlbspecia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