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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의 꽃 보다 야구

1990년대 양키스를 이끈 인물들 (최종)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6. 23.

현재 미 프로야구가 양대리그(아메리칸 리그, 네셔널 리그)의 3개 지구(서부, 중부, 동부지구)로 편성된 것은 1994년도 부터였다. 콜로라도 로키스, 플로리다 말린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템파베이 레이스 등이 90년대 이후 생겨난 신생팀이었으며, 이들 신생팀 창단에 맞추어 미 프로야구도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각 리그별 중부지구의 창시였다. 이 과정에서 밀워키 브루어스가 아메리칸 리그에서 네셔널 리그로 이동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렇게 큰 일이 메이저리그에 발생했지만, 월드시리즈 최다 우승팀으로 많은 이들의 칭송을 받던 뉴욕 양키스는 이 시기에 '암흑기'로 들어서면서 하위권을 전전하였다. 지금의 모습과는 180도 달랐다고 보면 된다. 1980년 리그우승을 끝으로 다시금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던 1995년에 이르기까지 15년간, 그들은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의 들러리로 전락했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지금의 ‘제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는가? 대계 1992년을 고비로 지금의 '최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선수들이 나타난 것에 의의를 두는 사람들이 많다. 실질적인 양키스 독주체제가 정립된 것도 이때부터였는데, 이는 때맞추어 나타난 양키스 프랜차이즈 스타 외에도 FA로 영입했던 선수들의 대거 활약 및 구단주와 감독의 역할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렇다면 1990년대 양키스의 모습은 어떠했으며, 양키스의 부흥을 이끌었던 주요 인사들은 누구였을까?

Part 3. 선수단 - 매팅리, 그리고 지터

1990년대 양키스를 이끈 선수단은 벅 쇼월터가 양키스 감독으로 취임한 92년을 전후하여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92년도 이전까지는 단 한 명의 선수에 의해 양키스가 운영되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양키제국의 영원한 캡틴, 돈 매팅리(Don Mattingly)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1983년, 켄 그리피 시니어의 백업맴버로 양키스에 대뷔했던 매팅리는 첫 해에 92경기에 출전하여 0.283의 타율을 기록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다가 84년에 비로소 풀타임 출전하며 주전을 꿰찼는데, 그나마 이때에는 양키스 사정이 그럭저럭 괜찮았다. 매팅리 자신은 풀타임 첫 해에 0.343 AVG, 12 HR, 110 RBI를 기록하였고 그 외에도 윌리 랜돌프, 데이브 윈필드, 켄 그리피 시니어 등과 같은 슈퍼스타들이 라인업을 꿰차고 있었다.

한편 투수진에서는 필 니크로가 양키스를 대표하는 투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987년도에 팀이 4위로 처진 것을 기점으로 양키스의 주포들도 한, 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1988년에 양키스가 지구 5위를 차지하는 사이에 라인업에서 제 몫을 다 해 주는 선수는 매팅리를 비롯하여 데이브 윈필드밖에 없었고, 투수진에서는 토미 존과 존 칸델라리아, 그리고 당시 영건이었던 알 라이터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이런 선수들도 거의 다 빠져나가고, 당시 잠시 감독직을 맡았던 루 피넬라마저 팀을 떠나자 제국은 그야말로 '혼란'에 빠졌다. 1989년도를 시작으로 투수진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홀로 팀을 꾸려나가던 매팅리의 뒤를 받쳐준 이는 외야수 로베르토 켈리뿐이었다. 그러던 매팅리도 90년도에는 망가졌고, 주장이 무너지자 양키스는 투 - 타 밸런스가 무너지며 그 해에 리그 7위를 기록하는 최악의 부진을 경험하였다. 이후 매팅리가 살아나면서 양키스도 성적면에서 약간의 향상을 거두었고, 1992년 벅 쇼월터 감독 취임 이후 기존 멤버와 외부 영입인사의 조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쇼월터의 취임과 더불어 1993년부터는 추후 양키스 제국을 일으킬 선수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버니 윌리엄스, 폴 오닐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마이크 스탠리, 웨이드 보그스등이 나타난 것도 이때부터였다. 백업맴버로 추후 양키스를 구하는 월드시리즈 쓰리런 홈런의 주인공, 짐 레이리츠도 이 해에 처음으로 3할을 넘겼다. 아쉽게도 93년도에는 PO 진출에 실패했지만, 매팅리를 비롯한 선수단 전원이 내년시즌을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을 봤음에는 분명했다.

선수파업으로 시즌이 중단됐던 1994년에는 무려 네 명의 선수가 3할 타율을 넘기며 한껏 물오른 기량을 과시했다(마이크 스탠리, 웨이드 보그스, 폴 오닐, 루이스 폴로니아). 투수진에서는 짐 에보트, 지미 키등의 선수가 분전하였다. 그리고 매팅리가 마지막으로 선수생활을 했던 1995년, 양키스는 그토록 기다리던 PO에 진출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바로 이 해에 엔디 페티트가 신인으로서 12승을 거두며 젊음을 과시하였고, 데이비드 콘을 비롯하여 마리아노 리베라가 등장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때까지만 해도 리베라가 선발투수였다는 사실이다. 추후 양키스의 주전포수로 성장하게 될 호르헤 포사다도 이때에 태어난 선수였다.

허나 양키스는 숙원이었던 월드시리즈 타이틀을 따내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그 해를 끝으로 매팅리가 은퇴를 선언하자 공석이 된 양키스 1루 자리를 맡게 되는 선수가 시애틀로부터 건너오게 된다. 바로 전년도에 시애틀 유니폼을 입고 양키스와 가을리그를 겨루었던 티노 마르티네즈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어제의 적이 바로 오늘의 동지가 되는 순간이었다.

바로 전년도에 31홈런을 기록하며, 시애틀의 챔피언십 시리즈 진출에 기여했던 점을 구단주 스타인브레너가 잊지 않았던 것. 여기에 양키스 팜 출신인 천재 유격수 데릭 지터도 이때 처음 모습을 드러냈으며, 마리아노 던컨, 루벤 시에라, 세실 필더, 데럴 스트로베리, 루이스 소호등도 이때에 양키스에 몸을 담고 있었다.

한편 투수진에서는 엔디 페티트가 21승을 거두며 좌완 에이스다운 위용을 과시했고, 지미 키, 케니 로저스, 드와이트 구든 등이 5인 선발로테이션을 꾸미고 있었다. 여기에 클로저 존 웨틀랜드의 존재도 빼놓을 수 없다.

이렇듯 좋은 멤버를 구축한 양키스는 투-타 짜임새를 앞세워 애틀란타를 물리치고 근 20년만에 월드시리즈 타이틀을 따낸다. 주장 매팅리, 감독 쇼월터가 물러난 바로 이듬해에 거둔 우승이라 상당히 아쉽긴 하였지만 어쨌든 양키스가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기까지 이 둘의 존재는 무척이나 소중했다.

1998년도는 양키스가 크게 허물을 벗는 해였다. 오랫동안 안방을 지켜 온 조 지라디를 대신하여 젊은 호르헤 포사다가 안방마스크를 썼고, 당시까지만 해도 좋은 내야수였던
척 노블락이 양키스에 합류하였다. 이 외에 웨이드 보그스가 떠난 3루 자리를 FA로 영입한 스캇 브로셔스로 매꾸었고, 세실 필더가 팀을 떠나자 그 즉시 지명타자로 데럴 스트로베리를 썼다. 마운드에서도 올란도 에르난데스, 히데끼 이라부등이 새로 영입되었고 마리아노 리베라가 서서히 ‘마무리 투수’ 엔진을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무서운 팀으로 변한 양키스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성적을 거두게 된다.

1. 선발타자 전원 두 자릿수 홈런 기록
2. 3할 타자 넷 배출(스캇 브로셔스, 데릭 지터, 버니 윌리엄스, 폴 오닐)
3. 80타점 이상 5명
4. 팀 타율 0.288
5. 선발투수 5인 전원 10승 이상 기록
6. 15승 이상 3명(콘, 페티트, 웰스)
7. 팀 평균자책점 3.82

결국 양키스는 2년 만에 월드시리즈 패권을 다시 차지하며, 서서히 독주 체제를 굳혀가고 있었다. 그리고 2000년까지 월드시리즈를 3연패 하는 동안 이 멤버는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고, 이때부터 많은 선수들이 '양키 프리미엄'을 지불하면서까지 입단을 시도했다. 그 대표적인 선수 중 하나가 바로 로저 클레멘스. 우승을 위해 양키스행을 택한 그는 선발마운드 필두에 서서 이적 첫 해에 바로 우승반지를 끼는 영광을 누렸다. 이 외에도 데이비드 저스티스, 데니 네이글 등이 2000년도에 뒤늦게 양키스에 합류하여 뉴욕 메츠와의 서브웨이 시리즈를 승리로 이끄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맺으며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FA를 싹쓸이했던 2001년 이후부터 양키스는 월드시리즈 우승에서 항상 한 걸음 모자란 행보를 보였다. 막대한 자금력으로 좋은 선수를 불러들인 만큼, 시즌 100승은 기본으로 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양키스 팬들이 많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일부 양키스 팬들은 제국의 재건이 완성되었던 1996~2000년도를 그리워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지금도 양키스는 충분히 시즌 100승을 거둘 수 있는 전력을 구축했다. 그러나 이러한 양키스도 지구 라이벌들에게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야구 참 모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축구공만 둥근가? 여기 야구공도 둥글다. 그 점을 1990년대 양키스가 증명해 주었고, 지금도 그 진리를 증명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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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http://mlbspecial.net

※ 본 고는 위클리 이닝(inning.co.kr)에 기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