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한신’ 손민한(롯데 자이언츠)이 26일, 한화 이글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개인 통산 100승을 기록했다. 10년간 꾸준히 10승을 기록해야만 가능하다는 100승 고지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단 20명만이 밟아 본 ‘꿈의 영역’이다. 특히, 역사가 짧고 기반이 척박한 한국 프로야구에서 100승은 아무나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200승을 기록한 송진우(한화 이글스)가 그러했고, 정민철(161승)과 선동열(146승)이 그러했다.
▷ ‘기대주’ 손민한, 거인 유니폼을 입다
1997년 신인 1차 드래프트에서 롯데는 손민한과 진갑용(삼성 라이온스) 중 누구를 선택할지 고심했다. 부산고-고려대 동기로서 7년간 배터리를 이루어 왔던 ‘환상콤비’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도 어려울 법했다. 롯데는 고심 끝에 ‘미래의 에이스’ 손민한을 선택했다. 그리고 계약금 5억원 이라는, 구단 역사상 최고액으로 거인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롯데는 신인 계약금 투자에 인색하다는 평을 받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손민한에게 거액을 안긴 것은 그에게 갖는 기대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롯데는 2005 신인 드래프트에서 김수화에게 계약금 5억 3천만 원(역대 롯데 구단 최고액)을 투자한 것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신인 계약금 5억원을 넘긴 적이 없었다.
큰 기대를 안고 그 해 5월 28일, 손민한은 사직 한화전에서 프로 첫 등판을 신고했다. 그리고 홈 팬들이 보는 앞에서 7이닝 1피안타 1실점으로 데뷔 첫 승을 거두었다. 윤학길(현 히어로즈 코치)의 뒤를 잇는 ‘차세대 에이스’의 등장에 부산 팬들은 환호했고, 손민한 본인도 장밋빛 미래를 예고하는 듯 했다.
그러나 대학 시절에 무리했던 것이 결국 팔꿈치 부상으로 이어졌다. 이에 손민한은 그 해에 9경기 출장에 그치며 1승 3패 1세이브, 방어율 4.80을 마크하며 혹독한 신고식을 마쳤다. 이후 손민한은 1998 시즌 전부를 재활군에 머무는 등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99 시즌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비중 없는 경기에서 원 포인트 릴리프, 혹은 임시 마무리 투수로 마운드에 오른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전국구 에이스’의 위용은 입단 4년 차인 2000 시즌에야 드러났다. 당시 28경기에 선발로 등판하며 12승 7패, 방어율 3.20을 마크한 손민한은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으로도 선발되며, 동메달을 목에 거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이에 한껏 고무된 손민한은 이듬해에 최다승 타이틀(15승)을 차지하며, 서서히 ‘민한신’의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역투하는 손민한 ⓒ 롯데 자이언츠
▷ 외로운 에이스…롯데 암흑기를 홀로 지키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 성적에 관계없이 롯데는 최하위를 전전하게 됐다. 최악의 암흑기를 보낸 롯데는 에이스의 승리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손민한 스스로가 매 경기 완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2002 시즌을 맞이한 손민한은 6경기 만에 첫 승을 거두게 된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5월 22일 마산 LG전(7과 2/3이닝 동안 5피안타 1실점)에서 선발승을 거둔 이후 8월 3일 사직 두산전(7과 2/3이닝 동안 10피안타 3실점)에서 승리투수가 되기까지 10경기 동안 승리투수가 되지 못했다. 결국 손민한은 142와 1/3이닝(방어율 3.67)을 소화하고도 단 4승에 그치는 최악의 불운을 경험했다.
그러나 2003년은 팀과 손민한 모두에게 최악의 한 해였다. 개막 12연패로 시즌을 시작한 롯데는 팀 상황이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손민한 본인도 시즌 초 6연속 퀄리티 스타트(선발투수가 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로 던졌을 때 주어지는 기록)를 하고도 단 1승을 거두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손가락 골절상까지 찾아와 잠시 팀을 떠나있어야 했다. 이 해에 손민한은 3승(방어율 4.86)에 그치며 팀의 몰락을 지켜봐야만 했다.
악몽과 같던 2003 시즌이 끝나자 손민한은 2004년 전반기에는 마무리투수로 보직을 바꾸게 된다. 그만큼 마땅한 마무리 투수감이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이에 손민한은 전반기 동안 8세이브를 거두며 뒷문을 책임졌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노장진이 트레이드로 팀에 합류하며 다시 선발로 뛸 수 있었다. 선발 전환 후 손민한은 8승 1패, 방어율 2.17을 마크하며, 부활을 신고했다. 결국 손민한은 9승 2패 8세이브, 방어율 2.73을 기록하며 성공적인 한 해를 보냈다.
이후 손민한은 꾸준히 롯데 선발 마운드의 최선봉에 서 있으면서 에이스로의 위용을 과시했다. 특히, 2005 시즌에는 다승 1위(18승)와 방어율 1위(2.46)를 차지하여 ‘전국구 에이스’가 누구인지를 증명해 보이기도 했다.
▲ 2005 시즌 MVP에 선정된 손민한 ⓒ 롯데 자이언츠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던 손민한은 다시 한 번 국가의 부름을 받았다. 바로 2006,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때였다. 특히, 2006 WBC에서는 고비였던 미국전에 선발로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당시 강타자였던 미국의 알렉스 로드리게즈를 3구 삼진으로 돌려세운 장면은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을 정도다.
▷ 100승을 넘어 150승으로!
1975년생인 그는 올해 34세다. 30대 중반에 들어선 투수가 이제 갓 100승을 마크했다는 것은 다소 늦은 감이 있을 수 있다. 특히, 그보다 어린 김수경(히어로즈), 임창용(야쿠르트)은 그에 앞서 100승 고지를 먼저 밟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개인통산 100승’ 가치를 낮게 볼 수 없다. 특히, 롯데는 작년 가을잔치에 오르기까지 하위권을 전전했던 팀이었다. 그 가운데 오히려 꾸준히 선발 마운드 필두에 서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칭찬을 받을 만하다.
메이저리그에서도 1910년대 ‘최약체’로 평가받았던 워싱턴 세네터즈에서 부동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월터 존슨도 마찬가지였다. 호투하고도 패전을 기록한 경기가 많았음에도 불구, 존슨은 워싱턴에서만 머물며 개인 통산 417승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따라서 손민한의 ‘개인통산 100승’은 또 다른 목표를 제시하는 하나의 지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향후 4~5년간 롯데 마운드를 책임질 수 있음을 감안해 보았을 때 충분히 150승도 가능하다. 그러나 손민한은 이에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 통산 100승을 거두었을 때 그는 또 다른 목표로 ‘팀 우승’을 꼽았다. 그만큼 1992년 이후 우승에 목말라 있는 고향 팬들에게 시원한 한 줄기 바람이 되고 싶은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과연 그가 올 시즌 다시 한 번 에이스로의 위용을 과시하며, 팀을 가을잔치로 이끌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 유진(http://mlbspecia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