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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져의 야구 칼럼/MLB Stories

지금은 장타력 있는 1번 타자의 시대

by 카이져 김홍석 2008. 1. 9.
 

야구의 전략과 전술이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며, 그에 따라 타자들의 역할도 변화해왔다. 그것은 각 타순별로 타자들이 맡게 되는 임무도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는 말이다.


전통적으로 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타순은, 공격의 첨병 역할을 하는 1번과 클린업 트리오라 불리는 3,4,5번이었다. ‘1번이 나가고 2번이 보내고 3~5번이 불러들인다.’ 라는 것은 한국와 일본 야구에서는 거의 정설처럼 통한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이러한 점이 그대로 적용될까? 현재의 추세로 보자면 ‘NO'라고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이번 칼럼에서는 1번 타자의 역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 리키 핸더슨의 등장과 뒤를 이은 크렉 비지오


1960년대 중반 이후로 70년대와 80년대까지는 타자들이 투수들에게 기를 펴지 못하던 시기였다. 마치 지금의 한국 야구처럼 홈런이 적게 나왔던 시기였고, 이 당시 1번 타자의 미덕은 어디까지나 안타 등으로 인한 출루와 도루였다.


하지만 70년대 말, 역대 최고의 1번 타자라 할 수 있는 한 선수가 등장한다. 그 이름은 리키 핸더슨, 40세가 넘어서도 선수 생활을 끈질기게 어어 온 덕분에 통산 타율(.279) 등에서 많은 하락이 있었지만 그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1번 타자였다.


통산 2295득점과 1406도루는 역대 1위의 기록이며, 2190개라는 1번 타자답지 않은 어마어마한 볼넷은 배리 본즈에 이어 역대 2위에 올라있다. 3000안타를 달성한 선수이며 그 중 10%가량인 297개를 홈런으로 장식한 선수다.


정교한 타격과 뛰어난 선구안 그리고 빠른 발을 모두 갖춘 핸더슨은 그 자체만으로도 최고의 1번 타자로 평가받았지만 그는 86년 28홈런(리그 6위)을 기록한 적이 있을 정도로, 연평균 16개의 홈런을 쳐주는 장타력도 겸비한 선수였다.


이러한 핸더슨의 뒤를 이은 선수가 크렉 비지오다. 마찬가지로 3000안타를 달성한 비지오는 빠른 발(통산 414도루) 못지 않은 장타력을 갖춘 선수다. 20홈런 시즌이 무려 8번이나 될 정도로 뛰어난 장타력을 과시했으며 매년 60개 이상의 장타를 터뜨리며 킬러-B의 선봉장 역할을 했다.


역대 최고이며 80년대 최고의 1번 타자였던 리키 핸더슨과, 90년대 최고였던 크렉 비지오, 이 두 사람으로 인해 1번 타자에 대한 시각이 많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들은 출루해서 득점하는 선수임에 동시에 앞선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이는 역할도 함께 병행했던 선수다.


매년 100득점 이상을 기록할 뿐만 아니라, 타점도 70개 이상을 꼬박꼬박 기록했다. 이들은 단순히 하위타선과 중심타선을 이어주는 교량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팀 타격의 중추이자 핵심이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정도의 타격을 갖춘 선수라면 3번 타순에 배치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들은 계속해서 리드오프로 남았고, 그에 따라 1번 타자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상상을 초월하는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진다.



▷ 브래디 앤더슨의 50홈런


90년대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1번 타자 역할을 도맡아했던 브래디 앤더슨은 1996년 시즌 50홈런이라는 상상도 하지 못한 대형 사고를 친다. 데뷔 후 8년 동안 73개의 홈런에 그치며 장타력보다는 빠른 발을 이용해 1번 타자의 역할을 수행하던 선수가 어느 날 갑자기 일으킨 사건이었다.


당시 50홈런은 단일 시즌 기록으로 역대 19위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기록이었으며, 마크 맥과이어(52홈런)에 이은 메이저리그 전체 2위의 기록이었다. 부상 없이 풀 시즌을 뛰어야 100득점을 겨우 넘기곤 했던 앤더슨은 그 해 37개의 2루타까지 곁들이며 117득점 110타점 21도루 .297/.396/.637의 화려한 성적을 남겼다.


앤더슨의 개인 성적만 좋아진 것이 아니었다. 팀 득점은 전년도(4.89)에 비해서 1점 가까이 상승한 5.82까지 치솟았고, 볼티보어는 앤더슨을 비롯해 라파엘 팔메이로(39홈런 142타점), 로베르토 알로마(22홈런 132득점), 칼 립켄 주니어(26홈런 102타점), 바비 보니야(28홈런 116타점) 등을 앞세워 와일드카드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다.


리그 최하위권에 불과한 팀 도루(76개-12위)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홈런 파워(257홈런-1위)만으로 이루어낸 결과였다. 앤더슨이 경기 시작과 동시에 상대 투수를 철저하게 망가뜨려준 덕분이었다.


이미 빌 제임스를 비롯한 세이버 매트리션들의 활약으로 도루가 경기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적으며 홈런과 볼넷이 중요하다는 논리가 빅리그에 스며들고 있었고, 오클랜드의 단장 빌리 빈처럼 그것을 팀 운영에 적용하는 관계자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메이저리그에서 본격적으로 1번 타자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30홈런을 밥 먹듯이 때려대는 알폰소 소리아노가 등장했고, 그는 리키 핸더슨으로부터 시작해 비지오와 앤더슨을 거치며 논란의 대상이 되 1번 타자의 역할에 대해 확인 도장을 찍어버린다.



▷ 지금은 장타력 있는 1번 타자의 시대


최근 들어 메이저리그에서 최고의 1번 타자로 꼽히는 선수라면 아메리칸 리그는 그래디 시즈모어와 커티스 그랜더슨, 내셔널 리그는 호세 레예스, 지미 롤린스, 핸리 라미레즈 등이다. 모두들 장타력을 겸비한 선수들이다.


한국 언론의 과장된 보도로 인해 이치로를 역대 최고 수준의 리드오프로 알고 있는 팬들이 많지만 현지 분위기는 전혀 아니다. 이치로를 리그 최고의 1번 타자로 꼽는 전문가는 시애틀 지역의 연고 기자가 아닌 다음에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성공시대를 열어간 것은 틀림없지만, 8년 전의 신드롬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 지금, 그의 실력에 대한 평가는 그 인기만큼 높지 않다.


잘 달리고 잘 치지만, 장타력을 갖추지 못한 이치로는 최고가 될 수 없다. 지난 해 클리블랜드와 시애틀의 팀 득점은 17점 차이였다. 공교롭게도 시즈모어(118득점 78타점)와 이치로(111득점 68타점)의 득-타점 차이의 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쉽게 말해 클리블랜드와 시애틀의 득점 차이는 시즈모어와 이치로의 능력 차이와 동일하다는 뜻이다.


타율에서 무려 7푼 이상 차이(.351-.277)가 나고 출루율(.396-.390)조차도 약간 뒤지는 시즈모어가 이치로보다 더 많은 득점과 타점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장타력 때문이다. 37개의 장타(6홈런)을 기록한 이치로는 63개의 장타(24홈런)를 때려낸 시즈모어에 비해 생산력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다. 시즈모어의 홈런이 하위 타선에서 출루한 주자를 불러들이고, 그 자신까지도 득점에 성공하게 만듦으로써 이치로와의 타율 차이를 극복하고도 남았던 것이다.


아무리 높은 타율과 많은 도루를 기록한다 하더라도 이치로, 후안 피에르, 라파엘 퍼칼, 션 피긴스, 윌리 타베라스, 루이스 카스티요 등의 타자들은 먼저 언급한 5명을 능가하지 못한다. 같은 타순에 배치했을 때, 득점과 타점에서 모두 뒤진다는 뜻이다. 물론 이들도 뛰어난 선수들이고, 전통적인 시각에서 1번 타자에 가장 부합하는 스타일의 선수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변해버렸다.


20개가 넘는 홈런을 비롯해 5~60개 이상의 장타 개수와 5할을 넘나드는 장타율, 거기에 빠른 발까지 겸비한 선수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들이야 말로 새 시대에 걸 맞는 이상적인 1번 타자라며 추켜세우고 있으며, 이 와중에 지미 롤린스는 2007년 내셔널 리그 MVP를 수상했다. 애리조나의 경우는 이도저도 안되자, 아예 팀 내 홈런 1위인 크리스 영을 1번 타자로 내세우기도 했다.


‘뛰어난 1번 타자가 팀을 강하게 만든다.’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강한 팀이 되기 위해선 좋은 1번 타자가 필요하다.’ 라는 말에는 동의한다. 장타력을 갖추었건 그렇지 못했건 간에, 앞서 언급한 리드오프를 보유한 팀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난해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현재의 추세와 시대의 흐름은 장타력이 있는 1번 타자를 선호하고 있고, 그러한 선수를 보유한 팀이 그렇지 못한 팀에 비해 한층 좋은 타력을 보유한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 야구의 흐름이 또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당분간은(어쩌면 계속해서) 장타력 있는 1번 타자를 선호하는 지금과 같은 추세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장타력 있는 1번 타자들이 리그를 주름잡는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