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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져의 야구 칼럼/프로야구 이야기

로이스터 감독에게서 ‘명장’의 향기를 느끼다

by 카이져 김홍석 2009. 9. 19.


마침내 롯데가 5연승에 성공하며 4강 진출을 위한 8부 능선을 넘어섰습니다. 4강 라이벌인 삼성과 히어로즈를 상대로 2승씩을 거두더니 준플레이오프에서 만날 가능성이 큰 두산까지 연파하며 기세를 한껏 올렸네요.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성공이 이제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지난해 한국 땅을 밟은 ‘프로야구 사상 첫 외국인 감독’인 로이스터는 2년 동안 한국 프로야구에 적잖은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그 유명한 ‘8888577’에 빛나는(?) 롯데를 지난해 3위로 견인하며 부산 팬들에게 8년만의 가을잔치를 선물했고, 올해도 2년 연속 진출이 유력한 상황이죠.

하지만 그런 로이스터 감독을 보고 ‘명장’이라 부르는 팬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올챙이 시절을 기억 못하는 어리석은 팬들은 툭하면 로이스터가 물러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고, 그의 성공은 단지 ‘운이 좋아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최근 5연승을 이끌어내는 로이스터 감독의 모습에서 ‘명장’의 향기를 아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느낌일 뿐이지만, 그가 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한국 무대에 정말 많이 적응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그 향기를 맡은 건 지난 일요일(13일)에 있었던 삼성전이었습니다. 당시 로이스터 감독은 로테이션을 무시하고 컨디션이 나쁜 송승준을 대신해 상승세의 조정훈을 선발로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성공적이었죠. 그날의 한 경기는 롯데의 올 시즌 전체 경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한 경기였습니다. 롯데가 이대로 4강에 진출한다면 바로 그날 조정훈의 호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17일의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였습니다. 미국식 야구의 특성상 한 번 로테이션이 밀렸다고 해도 등판 기회 자체를 박탈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로이스터 감독은 송승준을 아예 로테이션에서 제외해 버리고는 장원준 카드를 꺼내들었습니다. 한국 야구에서는 매우 상식적인 기용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메이저리그 감독 출신인 로이스터에게 그러한 결단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겁니다. 그가 2년에 걸친 한국 생활 끝에, 승리에 목숨 거는 한국식 야구를 어느 정도 습득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다음날인 18일 경기에서도 송승준이 아닌 조정훈이 선발 등판했지요.

세 번째는 바로 토요일(19일) 경기에서였습니다. 송승준과 이정훈이 이어던지며 9회초까지 롯데가 5-4로 앞서고 있었지요. 전 9회말에 당연히 애킨스가 등판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좋은 피칭을 이어가고 있던 이정훈이 끝가지 경기를 책임지더군요. 사실 이 부분이 가장 놀라웠습니다. 물론 애킨스가 전날까지 이틀 연속 등판하긴 했지만, 그 전에 9일이나 쉰 상태였고, 무엇보다 이용찬과 세이브 부문 공동 선두를 달리고 있는 상황이었죠.

메이저리그의 상식상, 9회의 세이브 찬스에서 마무리 투수가 등판하는 건 마무리투수가 가지는 일종의 ‘권리’이기도 합니다. 박찬호의 소속 팀인 필라델피아의 마무리 투수인 브래드 릿지가 그토록 잦은 방화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바뀌지 않은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지요. 에이스면 에이스, 4번 타자면 4번 타자, 그런 식으로 자신의 역할이 정해져있다면, 그 롤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개개의 선수가 자신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다해 승리하는 것이 바로 메이저리그 야구의 특징이죠.

하지만 로이스터는 전날 9회에 불안한 피칭으로 팬들에게 불안감을 심어줬던 애킨스에게 세이브 부문 1위로 올라설 기회를 제공하는 것 대신, 이정훈을 밀고 나가면서 좀 더 확실한 승리를 얻는 것을 택했습니다. 송승준을 로테이션에서 제외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죠. ‘승리’를 위해 선수의 ‘권리’를 제한한 것. 미국 야구의 시각에서 본다면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한국에서는 ‘사령관’이라는 별칭답게 팀을 완전히 장악하고 움직이는 감독을 ‘명장’이라 부르죠. 세이브 찬스에서 주전 마무리 투수가 등판하고, 선발투수의 보직을 가지고 있는 선수가 5경기마다 한 번씩 등판하는 것을 해당 선수의 ‘권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권리는 감독에게 주어져있고, 선수는 무조건 감독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죠. 권리가 큰 만큼 감독은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메이저리그는 개성 넘치는 선수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친화력 넘치는 감독을 ‘명장’이라 부릅니다. 자신보다 수십 배나 많은 연봉을 받는 선수들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그들의 권리를 지켜주면서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하나의 화음을 이끌어내는 감독이 인정을 받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4번 타자가 제 역할을 못하면 그 선수가 욕을 먹지 그를 계속 4번으로 기용하는 감독이 욕을 먹지는 않습니다. 감독과 선수의 관계를 여기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미국식 야구에 길들여져 있고, 계속해서 그러한 야구를 기본으로 하여 시즌을 치러왔던 로이스터 감독이 한국식 선수기용을 선보인 겁니다. 지난해에 비해 번트 등을 비롯한 작전지시가 잦아지고 있고, 투수교체 타이밍도 조금씩 빨라지긴 했지만, 지금의 변화는 훨씬 놀라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로이스터 감독의 팀 운영 방향은 메이저리그식 방법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한국 야구를 습득하고 있고, 그것을 실전에 응용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6~7월의 대반격이 미국식 믿음의 야구가 가지고 있는 저력이 발휘된 것이라면, 9월의 막판 스퍼트는 단기전 승부에 강한 한국식 야구의 힘이었습니다. 아직까지 재계약에 대한 말이 없지만, 내년이나 내후년이 되면 또 한 번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되네요.

물론 아직은 로이스터에게 ‘명장’이라는 수식어는 다소 이르겠죠. 하지만 그가 이대로 4강 진출을 확정짓고, 포스트시즌에서도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때는 어떨까요. ‘명장’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좋은 감독’임을 인정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진=롯데 자이언츠]

// 카이져 김홍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