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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져의 야구 칼럼/MLB Stories

‘역대 최고의 좌완’ 랜디 존슨을 추억하며

by 카이져 김홍석 2010. 1. 11.

지난주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좌완 투수 가운데 한 명인 랜디 존슨이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지난해 그렉 매덕스에 이어 또 한 명의 전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아쉬운 순간이었습니다.

207cm의 어마어마한 키와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날씬한(?) 몸매. 허리 이하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상체만을 사용하는 뻣뻣한 투구폼으로 엄청난 강속구와 슬라이더를 던졌던 선수. 사이드암에 가까운 스리쿼터였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과는 릴리스 포인트의 높이와 폭이 남달랐던 선수.

레프티 그로브, 샌디 쿠펙스, 스티브 칼튼, 워렌 스판과 함께 ‘MLB 역사상 가장 위대한 좌완 5인방’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랜디 존슨은 사이영상 5회 수상과 퍼펙트게임 달성 등 굵직한 업적을 남기고 자신의 선수생활을 마무리 했습니다. 지금부터 <SI.com>의 사진과 함께 그의 자취를 되돌아보죠.

랜디는 1963년 9월 10일 캘리포니아의 Walnut Creek에서 태어나 오클랜드의 왼손 투수인 바이다 블루(Vida Blue)를 꿈꾸며 자랐습니다. 그리고 고교졸업반 시절인 1982년 드래프트 4라운드로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에 지명되었죠. 애틀란타는 그를 위해 50만 달러의 계약금을 준비했지만, 랜디는 그걸 거절하고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로 진학합니다.

존슨은 첫 2년 동안 대학 리그에서 뛰었지만, 118이닝 동안 무려 104개의 볼넷을 허용하며 고작 6승을 기록하는데 그쳤고, 그가 소속된 Trojans(USC 야구부)는 Pac-10리그에서 최악의 성적을 거뒀습니다. 사진은 1985년 대학 시절 랜디의 투구모습인데요. 23살이라는 것이 믿어지시나요?ㅋ

대학리그에서 재미를 보지 못한 랜디는 시니어 자격으로 계속 뛸 각오까지 했었습니다. 그런데 몬트리올 엑스포스가 85년 드래프트에서 그를 2라운드 전체 34번으로 깜짝 지명하죠. 랜디는 마이너리그에서 3년 동안 착실하게 수업을 쌓은 후 88년 9월 메이저리그에 데뷔, 4경기에 등판해 3승을 거두며 순조롭게 빅리그에 정착합니다.

89년 5월, 랜디는 시애틀 매리너스로 트레이드 됩니다. 그리고 그의 야구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바로 그와 비슷한 스타일(삼진 끝내주게 잘 잡고 볼넷은 더 끝장나게 잘 허용하는)의 우완 놀란 라이언을 만난 것이죠. 그에게 조언을 받은 랜디는 전혀 다른 투수로 진화하기 시작합니다. 90년이 되면서 처음으로 200이닝을 소화했고, 그 때부터 3년 연속 리그 볼넷 왕(120-152-144)을 차지(?)하죠. 하지만 그 후로 다시는 100개 이상의 볼넷을 허용하지 않으며 리그 정상급 투수로 거듭납니다.

큰 키와 다듬어지지 않은 장말, 그리고 압도적인 피칭을 보여줬던 랜디는 단숨에 시애틀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스타가 됩니다. 이 사진은 1992년 랜디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보여주는 사진인데요, 재능보다는 드럼을 씹어먹을 것 같은 포스가 느껴지는군요.

1995년 랜디는 214이닝을 소화하면서 294개의 탈삼진(65볼넷)을 잡아냈고 18승 2패 평균자책 2.48의 놀라운 성적을 거두며 자신의 첫 번째 사이영상을 수상합니다. 그의 스승인 라이언은 끝내 볼넷을 줄이지 못해 사이영상급 투수가 되지 못했지만, 랜디는 성공했지요. 이 해를 기점으로 랜디는 다소 불안하면서도 나름대로 수준급 성적을 거두는 엘리트급 투수에서 리그를 지배하는 특급 투수로 거듭납니다. 사진은 95년 올스타전인데요. 우측부터 에드가 마르티네즈-랜디 존슨-티노 마르티네즈-켄 그리피 주니어입니다. 넷은 당시 모두 시애틀 소속으로 올스타전에 출장했지요.

랜디는 98년을 끝으로 FA 자격을 획득하게 되어 있었고, 마침 그 시즌 랜디와 매리너스는 동반 부진에 빠집니다. 결국 팀은 프레디 가르시아 등을 받는 조건으로 랜디를 휴스턴으로 트레이드 하죠. 타자들에게 유리한 구장(킹돔)에서 투수들에게 유리한 구장(에스트로돔)으로 옮겨 온 랜디는 이적 후 11경기에서 10승 1패 평균자책 1.28이라는 완벽한 투구를 선보이며 휴스턴을 포스트시즌으로 견인합니다. 사실 시애틀에서의 부진(9승 10패 4.33)은 재계약을 보장해주지 않는 팀에 대한 섭섭함을 드러낸 랜디의 고의적인 태업이었다는 말도 있지요.

랜디는 98년 디비즌 시리즈에서 두 경기에 등판해 14이닝을 4실점(3자책)으로 막아내지만, 팀 타선이 합쳐서 고작 1득점에 그치는 바람에 2패를 기록하고 팀도 탈락합니다.

98시즌이 종료된 후 FA가 된 랜디는 4년간 5300만 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신생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계약합니다. 이것은 연평균 액수로 당시 역대 최고 수준이었고, 그것은 디비즌 시리즈에서 랜디에게 패배를 안긴 케빈 브라운과 애리조나와 같은 지구에 속해 있던 LA 다저스를 자극합니다. 특급 선수들의 엄청난 연봉 인플레는 바로 이 랜디의 계약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계약을 맺을 당시 어머니인 캐롤과 포옹하는 장면입니다.

99년 애리조나의 배팅 피쳐인 토니 델로와의 한 컷. 거의 아빠와 아들 수준이군요.

애리조나로 이적함과 동시에 4년 연속 사이영상 수상이라는 기염을 토하며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나 커트 쉴링과의 ‘무적의 원투펀치’를 구성해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2001년이겠지요. 랜디는 그해 21승 6패 372탈삼진 평균자책 2.49의 환상적인 성적으로 자신의 4번째 사이영상을 수상했고, 쉴링과 더불어 월드시리즈 MVP를 공동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죠. 이듬해 랜디는 24승 5패 평균자책 2.32의 더 좋은 성적으로 5번째 사이영상을 거머쥡니다. ‘괴물’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던 시절이었죠.

월드시리즈 우승 후 제이 레노의 ‘The Tonught Show’에 출연한 모습.

2003년의 부상 이후 40세가 된 랜디를 바라보는 전문가들의 시선은 회의적인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랜디는 만 40세의 나이인 2004년 5월 18일 애틀란타 브레이브스를 2:0으로 제압하며 역대 최고령 퍼펙트게임을 달성합니다. 사이 영, 짐 버닝, 놀란 라이언, 노모 히데오에 이어 양대리그에서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5번째 투수이기도 하지요.

2005년 1월 랜디는 양키스로 트레이드 됩니다. 그리고 양키스는 그에게 2년간 3200만 달러의 연장계약을 약속하죠.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한 트레이드였지만, 양키스에서의 2년은 결과적으로 랜디가 통산 300승을 거둘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랜디는 2년 동안 4.37의 평균자책으로 34승을 거뒀고, 이것은 양키스니까 가능했던 일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랜디는 핀스트라이프를 입고 뛴 포스트시즌에서 좋지 못한 모습(13이닝 10실점)을 보였고, 결국 2년 만에 뉴욕을 떠나게 됩니다.

2007년 1월 랜디는 다시금 애리조나로 트레이드 됩니다.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순항하는 듯 했지만, 결국 그는 허리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고 말죠. 랜디의 재기 자체가 의혹에 휩싸였고, 300승을 향한 그의 꿈은 16승을 남긴채 그대로 불발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랜디는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은 후 2008년에 당당하게 메이저리그에 복귀, 11승 10패 3.91의 성적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재기합니다.

애리조나는 300승이 코 앞에 다가온 랜디를 포기하는 어리석은 짓을 했고, 뛸 곳을 찾던 랜디는 샌프란시스코의 러브콜을 받습니다. 그리고 2009년 6월 4일, 랜디는 역사상 6번째로 300승을 거둔 좌완 투수로 이름을 올립니다.


통산 303승 166패 평균자책 3.29, 4135⅓이닝 투구 1497볼넷 4875탈삼진(역대 2위) 100완투 37완봉, 사이영상 5회 수상, 올스타전 10회 출장 등 화려한 경력을 남기고 랜디는 그라운드를 떠났습니다. 알고 계시나요? 랜디가 선동열 삼성 감독과 63년생 동갑내기라는 거. 개인적으로 그다지 좋아하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그 큰 키와 환상적인 투구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 카이져 김홍석[사진출처:S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