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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져의 야구 칼럼/MLB Stories

프랭크 토마스와 마해영, 그들의 백의종군

by 카이져 김홍석 2008. 1. 20.
메이저리그의 90년대를 주름잡았던 최고의 선수는 켄 그리피 주니어와 배리 본즈라고 할 수 있다. 공수주 모든 면에서 완벽한 모습을 선보인 그 둘은 ‘선수’로서 가장 빛났다. 하지만 단순히 타격만을 놓고 본다면, 이들보다 미세한 우세를 점한 선수가 있다. 90년대 최고의 ‘타자’는 프랭크 토마스다.


1990년에 데뷔한 토마스는 이듬해부터 7년 연속으로 3할 이상의 타율에 100타점 100득점 100볼넷을 기록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프랭크 토마스만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기록이다.


그렇게 7년의 풀타임을 보낸 1997년까지 프랭크 토마스는 통산 257홈런 857타점 .330의 타율에 .452의 어마어마한 출루율, 그리고 .600의 장타율을 기록했다. 당시 메이저리그에서 통산 장타율 6할 이상을 기록하고 있던 선수는 토마스 단 한 명이었으며 출루율 역시도 현역 선수들 중 독보적인 1위였다.


2번의 MVP를 비롯해 7년 내내 MVP 투표에서 8위 안에 올라가는 등 마치 지금의 알버트 푸홀스를 연상케 하는, 아니 그 이상의 위력을 자랑했던 최고의 선수였다. 그런 토마스에게 소속팀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1998년부터 시작되는 7년의 장기 계약(총액 6,440만)을 보장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1998년 이후 토마스는 서서히 하향세를 그린다. 2002년까지의 5년 동안 토마스가 자신의 명성에 걸맞은 활약을 한 것은 단 한 시즌뿐이었다. 2000년에 토마스는 43홈런 143타점으로 MVP 투표에서 2위에 오르는 맹활약을 했지만, 나머지 4시즌은 평균 19홈런 72타점 그리고 2할 중반의 타율에 그치고 말았다.


2003년 42홈런으로 다시금 부활하는 듯 했지만 이후 2년 동안 부진과 부상에 시달리며 108경기만을 출장했다. 16년 동안 몸 담았던 화이트삭스가 88년 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던 2005년에도 그가 팀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프랭크 토마스의 팀이었던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토마스 없이도’ 우승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화이트삭스에 더 이상 토마스의 자리는 없었다.


2005시즌이 종료된 후 토마스는 “연봉을 삭감해도 좋으니 팀에 남고 싶다”라는 의사를 밝혔지만, 팀은 프랜차이즈 스타인 그를 비정하게 내친다. 할 수 없이 FA 시장에 나왔으나, 이미 전성기가 지나 부상까지 잦은 38살의 토마스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팀은 별로 없었다. 메이저리그 최고 스타플레이어 출신인 토마스로서는 굴욕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토마스에게 손을 내민 것은 ‘재활용의 마술사’ 빌리 빈 오클랜드 단장이었다. 빈이 제시한 조건은 1년간 50만 달러의 연봉, 물론 260만 달러의 인센티브 옵션이 걸려 있었지만 토마스의 명성에 비추어 본다면 너무나 하찮은 것이었다.


하지만 토마스는 겸허하게 그 조건을 받아들인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우기 보다는 자신의 명예 회복을 위한 ‘백의종군’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50만 불짜리 선수인 토마스는 2006년 화려하게 부활하며 연봉이 아닌 실력으로 자신의 명예를 드높였다.


4월 한 달 동안은 1할 대의 빈타(5홈런 11타점)에 시달리며, ‘역시나 한 물 갔다’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지만, 5월 이후부터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홈런포를 쏘아 올리며 팀 타선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5월 이후로는 115경기에서 무려 35개의 홈런과 103타점을 기록한 토마스는, 특히 포스트 시즌 진출을 위해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던 9월에만 11홈런 35타점으로 맹활약했고 그 덕에 오클랜드는 지구 1위로 디비즌 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었다.


137경기에서 39홈런 114타점을 기록한 토마스는 MVP 투표에서 4위에 올랐고, 1년 만에 다시 찾은 FA 시장에서는 토론토와 2년간 1812만 달러라는 좋은 조건에 계약할 수 있었다. 백의종군을 택한 프랭크 토마스가 다시금 장군으로 인정받게 된 순간이었다.


소속팀에게 버림 받고 자신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은퇴를 결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토마스에게는 500홈런을 향한 목마름이 있었고, 명예의 전당에 대한 꿈이 있었다. 지난해 토마스는 26홈런 95타점의 나쁘지 않은 타격을 보였고, 시즌 중반 염원하던 500홈런을 달성할 수 있었다.


올해 한국 프로야구에는 2006년 당시 프랭크 토마스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는 선수가 있다. 8년 만에 친정팀인 롯데 자이언츠로의 복귀를 꿈꾸는 마해영이다. 롯데 자이언츠를 대표하는 최고의 선수였으며, 삼성에서의 3년 동안은 3년 연속 30홈런을 쏘아 올리는 등 이승엽과 더불어 삼성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선수였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마해영은 .321의 타율에 32홈런 109타점을 평균으로 기록했다. 이 기간 동안 그보다 위라고 평가할 수 있는 선수는 이승엽 단 한 명뿐이었다. 그런 마해영이 FA가 되어 4년 간 28억원의 좋은 조건을 보장 받은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거액을 받고 KIA 유니폼을 입게 된 마해영은, 이후 LG를 시절까지 포함해 4년 동안 29홈런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정교함과 파워를 동시에 갖추고 있었던 전성기절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부활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FA 먹튀’라는 팬들의 냉정한 시선 속에서 점점 잊혀졌다.


그런 마해영이 다시금 롯데 자이언츠에 돌아왔다. 은퇴를 종용하는 이들도 있었고, 일부 팬들도 그러기를 원했으나 그 자신은 선수 생활 연장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마해영 정도의 선수가 돈 때문에 현역을 고집할 리는 없을 것,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단 한 가지, 바로 ‘명예회복’이다.


현재 마해영은 롯데에서 정식으로 입단 테스트를 받고 있다. 며칠 후면 공식적인 그의 거취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의 분위기로는 롯데에 합류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산의 팬들 역시도 그의 합류를 반기고 있는 눈치다.


1970년생인 마해영은 올해 만 38세가 된다. 공교롭게도 2006년 당시의 프랭크 토마스와 같은 나이다. ‘박수칠 때 떠나라’가 아니라 ‘백의종군’을 선택하며 명예회복을 노렸던 토마스는 화려한 부활의 날개 짓에 성공했다. 과연 마해영의 앞날에 예정된 결과는 무엇일까.


자신의 꿈이 있고, 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은퇴를 선택하는 선수들이 즐비했던 한국 프로야구에서 현재 마해영이 보여주고 있는 행보는 조금은 색다르다. 항상 선수들의 입장에 서서 입바른 소리를 하는 등 언제나 당당했던 마해영이 2008년 화려하게 부활하여 한국 프로야구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해 줄 것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