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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타임스 필진 칼럼

독수리의 ‘강심장’ 구대성을 추억하며…

by 카이져 김홍석 2010. 8. 17.

구대성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무엇일까? 몸이 거의 2루 베이스를 향한 상태에서 던지는 그 독특한 투구폼? 박지성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지칠 줄 모르는 강철체력? 모두 옳은 소리다. 그러나 그를 잘 아는 이들은 구대성하면 가장 먼저 '강심장'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린다.

 

삼성 투수 배영수는 "어릴 때부터 많은 투수들을 봐왔지만, 구대성 선배만큼 담이 큰 선수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고 회상한다. 2006 WBC 대표팀 당시 한솥밥을 먹었던 배영수는, 일본전에서 이치로에게 몸을 맞는 공을 던지며 '배열사'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는데, 훗날 이것이 구대성의 지시였음을 밝혀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승부가 한창 박빙이었는데 구대성 선배가 '니가 공이 빠르니까, 이치로를 한번 맞혀줘라. 책임은 내가 지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내가 이치로를 맞히고 교체됐는데, 그 다음에 구대성 선배가 등판해서 정말로 이닝을 깔끔하게 정리해버렸다"고 배영수는 밝혔다. 그날 이후로 배영수가 더욱 열렬한 구대성의 신봉자가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구대성의 강심장을 보여주는 일화는 이것만이 아니다. 선수경력의 대부분을 구원투수로 활약했던 구대성은 유독 위기상황에서 등판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어떤 상황에서도 주눅이 들거나 승부를 회피하는 법이 없었다.

 

“단지 빠른 공이나 제구력으로 압도하는 마무리는 이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구대성은 이들과는 또 달랐다. 뭐랄까. 타고난 뱃심이라고 할지, 위기상황을 오히려 더 즐기는 여유란 게 있었다.” 한화 관계자의 말이다.

 

“한번은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경기를 마무리 하러 올라왔는데 어쩌다가 실책과 폭투가 이어지면서 그만 주자가 만루가 되어버린 상황이 있었다. 웬만한 선수 같으면 베테랑이라도 당황하거나 동료들에게 미안해서 주눅 들기 십상인데, 구대성은 그 상황에서 한번 씩 웃고는 더 이상 표정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후속타자들을 삼진과 병살타로 돌려세우며 이닝을 끝내 무실점으로 마감했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크게 기뻐하거나, 크게 대수로운 일이라는 기색도 없었다. 그때 정말 담이 크구나 하는 걸 느꼈다."

 

보통의 투수들이 위기를 강인한 집중력으로 돌파한다면, 구대성은 아예 위기를 위기로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 큰 경기를 즐기는 스타일의 투수였다고 사람들은 회상한다. 이런 낙천적인 여유와 두둑한 배짱이 그를 90년대 최고의 좌완투수로 발돋움시킨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독특한 투구폼과 타고난 체력도 구대성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구대성은 공을 던질 때 거의 2루수를 보고 돌아선다. 상대 타자들은 거의 구대성의 등이 보일 정도다. 그 자세에서 발을 들고 공을 던진다. 릴리스 포인트까지 상대 타자들은 구대성의 손을 볼 수 없다 보니 타격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다. 한국 타자들만이 아니라 일본과 미국 타자들도 구대성의 볼배합을 읽어내는데 애를 먹었다.

 

박지성이 '두 개의 심장'이라면 구대성은 '3개의 심장'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독특한 투구폼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자기관리와 유연한 신체 밸런스를 앞세워 장수했다는 점이 돋보인다. 구대성은 1994시즌부터 2000시즌까지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7년 연속 100이닝 이상을 소화했다. 이중에는 선발로 나서서 완투 경기도 무려 9차례나 포함되어있었다.

 

'혹사 머신' 강병철 감독의 영향도 있었지만, 비정상적인 등판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큰 부상 없이 건재했다는 것은 그만큼 구대성의 강철 같은 스태미너와 완벽에 가까운 자기관리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시만 해도 2,3일 연속 등판은 물론이고 심지어 7,8회 이전에 마운드에 올라 경기 끝까지 소화하며 사실상 전천후 계투로 활약했다.

 

MVP를 차지한 96시즌에는 다승(18)-평균자책점(1.88)-승률(85.7%), 그리고 세이브와 구원승을 합한 세이브 포인트(40)까지 더하여 4개 부문을 석권하기도 했는데, 마무리 투수이면서도 규정이닝을 채운 덕이었다. 2001년 일본진출을 앞두고 “1~2이닝만 던지라면 매일 같이 던질 수도 있다.”고 호언장담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실제로 구대성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3,4위전에서 일본의 마쓰자카(보스턴 레드삭스)와 선발 맞대결을 펼쳐 9이닝 1실점의 완투승을 거두며 한국의 동메달 획득에 기여한바 있다. 당시 구대성의 투구수는 무려 155, 그의 거칠 것 없는 열정 어린 투구는 전 국민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어디에서든 금방 적응하는 낙천적인 성격과 끝없는 승부근성은 구대성이 한국 선수로서는 드물게 일본과 미국 무대까지 두루 섭렵하며 장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41세의 나이에 현역에서의 은퇴를 선언한 그가 수많은 팬들로부터 진심 어린 박수를 받는 이유다.

 

구대성은 이글스 유니폼을 입고 통산 13시즌 동안 568경기에 출전, 67 71 214세이브 탈삼진 1,221개 평균자책점 2.85를 기록했으며, 일본무대에서는 2001년부터 4년간 24 34패 평균자책 3.88, 미국에서는 2005년부터 2시즌 동안 33경기에 나서 승패 없이 평균자책점 3.91을 기록했다. 그가 한국무대에서 남긴 213세이브의 기록은 김용수(LG)에 이은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영원히 독수리 마운드를 지킬 것 같던 구대성도 세월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었다. 지난해 정민철, 송진우의 잇단 은퇴에 이어 구대성의 은퇴는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던 한화의 황금세대가 이제 시대의 추억으로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구대성은 떠나지만 그가 남긴 독수리의 심장은 영원히 이글스 팬들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 구사일생 이준목[사진=한화 이글스, 기록제공=Stat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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