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2010시즌 한국 프로야구가 한국시리즈를 끝으로 일단 끝이 났습니다. 물론 아직 한-일 챔피언십이나 아시안게임 등이 남아 있어서 아구를 즐길 기회는 더 남아 있지만, 그건 일종의 ‘보너스’죠. 본 게임은 사실상 끝이 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프시즌이 되면 가장 먼저 관심이 가는 것은 역시 각종 시상식입니다. 이미 각 기록 부문별 타이틀 수상자는 가려진 상황이지만, 올 시즌 최고의 선수를 가리는 MVP와 최고의 신인을 뽑는 신인왕, 그리고 각 포지션별로 가장 뛰어난 선수를 선정하는 골든글러브 등의 굵직한 상은 아직 그 주인공이 확실히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KBO는 오는 25일(월)에 프로야구 출입기자단의 투표로 올 시즌 MVP와 신인왕을 가린 후 시상할 예정입니다. 더불어 기록 개인 부문 시상(투수부문 6개, 타자부문 8개)도 함께 하게 됩니다. 올 시즌 영광의 주인공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이미 사실상 2010시즌의 MVP는 이대호로 결정이 난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야구기자들이 전통적으로 워낙 투수를 좋아해 이변이 일어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대 3번째 트리플 크라운의 주인공이자 사상 첫 타격 부문 7관왕의 위업을 달성한 이대호를 외면할 순 없을 겁니다. 9경기 연속 홈런이란 세계 신기록도 작성했으니까요. 사실 이날의 시상식은 이대호의 원맨쇼가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무려 8개의 상(MVP 포함)을 받아야 할 테니까요.
오히려 관심은 누가 2위를 차지하느냐에 모아지고 있습니다. 이대호와 더불어 MVP 후보로 선정된 나머지 2명은 모두 투수, 바로 ‘시대의 라이벌’인 류현진과 김광현이죠. 올 시즌 1인자와 2인자로 그 명암이 확실하게 갈리는 듯 했지만, 마지막에 류현진의 완벽했던 사이클이 헝클어지면서 그 차이는 많이 좁혀졌습니다. 그 결과 엉뚱한 곳에서 1위도 아닌 2위를 두고 자존심 대결을 벌이게 된 셈이죠.
류현진은 올해만 23경기 연속, 작년부터 29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12년 만에 선발투수로서 1점대 방어율(1.82)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비록 시즌 막판에 한대화 감독의 지나친 배려(?)로 인해 상대를 가려가며 등판하다 오히려 리듬이 깨지는 바람에 연속 QS 기록이 중단되었고, 그 후 부상으로 9월을 거의 통째로 쉬면서 시즌 승수도 16승으로 마감했지만, 류현진이 올 시즌 보여준 퍼포먼스는 전성기 시절 선동열의 그것과 비견될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이었습니다.
김광현 – 31경기(30선발) 2완투 1완봉 193.2이닝 13피홈런 89사사구 183탈삼진 17승 7패 방어율 2.37 (다승-최다이닝 1위, 방어율-탈삼진 2위, 승률 5위)
류현진 – 25선발 등판 5완투 3완봉 192.2이닝 11피홈런 54사사구 187탈삼진 16승 4패 방어율 1.82 (방어율-탈삼진 1위, 다승-최다이닝-승률 2위)
김광현도 올 시즌 데뷔 이후 최고의 시즌을 보냈습니다. 류현진이 워낙 화려한 기록을 남기는 바람에 다소 빛이 바라긴 했지만, 많은 이상을 소화하며 리그 다승왕에 올랐죠. 류현진이 토끼였다면 김광현은 거북이였습니다. 빠르게 달리던 토끼 류현진은 예기치 못한 장애물(한대화 감독) 때문에 한 번 크게 넘어진 후 강제로 잠들 수밖에 없었지만, 거북이 김광현은 꾸준히 쉬지 않고 달려온 덕분에 마침내 2개 부문에서 토끼의 기록을 넘어설 수 있었죠. 기록의 화려함은 류현진에 미치지 못하지만, 꾸준하게 시즌 막판까지 소화한 김광현의 기록도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메이저리그에는 리그 최고의 투수에게 주는 ‘사이영상’이 따로 존재하죠. 그 덕분에 최근 들어서는 더더욱 ‘MVP=최고타자, 사이영상=최고투수’라는 공식이 굳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투수라고 해서 MVP로 선정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죠. 투수들도 MVP에 도전할 수 있고, 간간히 표를 꽤 많이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투수들만 놓고 봤을 때도 ‘사이영상’의 투표결과와 ‘MVP’의 투표결과가 꼭 비례하여 순위가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지난해 내셔널리그(NL) 사이영상 수상자인 팀 린스컴(100포인트)은 정말 근소한 차이로 크리스 카펜터(94)와 아담 웨인라이트(90)를 제치고 사이영상을 수상했습니다. 하지만 MVP 투표에서는 18위에 머물러 각각 14위와 15위였던 저 두 명에게 밀리고 말았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소속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 여부였죠.
2001년으로 넘어가면 좀 더 흥미로운 결과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랜디 존슨은 32장의 1위표 중 30장을 독식하며 압도적인 차이로 사이영상을 수상했습니다. 하지만 MVP 투표에서는 팀 동료이자 사이영상 투표에서 2위에 머물렀던 커트 쉴링에게 득표수에서 밀리고 말았습니다. 고작 1포인트 차이로 10위와 11위긴 했지만, 사이영상 투표에서의 저 엄청난 차이를 감안하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결과였지요.
랜디 존슨 – 21승 6패 249.2이닝 3완투 2완봉 372탈삼진 방어율 2.49
커트 쉴링 – 22승 6패 256.2이닝 6완투 1완봉 293탈삼진 방어율 2.98
사이영상 투표에서 랜디가 쉴링을 큰 차이로 누를 수 있었던 것은 방어율과 탈삼진의 차이가 비교적 컸기 때문입니다. 쉴링이 1승을 더 거두고 투구이닝이나 완투 회수도 더 많았지만, ‘투수로서 누가 더 위력적인 피칭을 했나?’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더 많은 타자들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낮은 방어율을 기록한 랜디 존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MVP는 다르죠. ‘누가 더 가치 있는 선수인가’를 따진다면 탈삼진 개수는 무의미한 수치가 됩니다. 땅볼 아웃이나 삼진 아웃이나 사실 차이는 없으니까요. 승수가 많다면 방어율도 큰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당시 경기당 득점 지원률은 랜디(6.31)가 오히려 쉴링(5.93)보다 더 높았습니다. 그런데도 방어율이 높은 쉴링이 더 많은 승수를 거뒀다는 것은 그만큼 쉴링이 타선이 낸 점수에 따라 어떻게든 역전이나 동점은 허용하지 않는 ‘에이스의 피칭’을 보여줬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두 선수의 소속팀인 애리조나느 쉴링이 등판한 35경기에서는 27승(8패)을 거둔 반면, 랜디가 등판한 경기에선 25승(10패)에 그쳤습니다. 이 차이가 MVP 투표에서 반영된 것이죠. 그런 이유에서인지 이미 시즌 막바지가 된 시점부터 기자들로부터 ‘사이영상은 랜디, 하지만 MVP를 뽑는다면 그건 쉴링’이라는 말이 나온 상태였습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올 시즌 류현진과 김광현의 경우도 비슷한 잣대를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의 주인공을 가린다면 당연히 류현진이겠지만, 그 상이 MVP라면 고민의 여지는 있다고 봅니다.
올 시즌 ‘최고의 투수’는 누가 뭐래도 류현진입니다. 경기 내용에서부터 다른 투수들과는 격을 달리합니다. 경기당 평균 112.6구를 던지면서 7.71이닝을 소화했고, 단 한 명의 주자도 후속 투수에게 남겨준 적이 없지요. 정말 이토록 완벽한 선발투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올 시즌 류현진의 피칭은 놀랍고도 대단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도 최고 투수에게 주어지는 상이 존재한다면, 만장일치가 확실했을 겁니다.
하지만 류현진은 시즌 내내 많은 투구수 때문에 긴 휴식일이 적용되었고, 또 막판에는 부상으로 더 이상 던지지 못했기 때문에 등판 경기수는 25경기에 불과합니다. 결코 많은 회수라고 할 순 없죠. 그가 등판한 경기에서 한화는 16승 1무 8패를 기록했습니다.
김광현의 투구 내용은 확실히 류현진에 비하면 부족함이 있습니다. 경기당 평균 6.39이닝을 던졌고, 이것은 리그 2위의 기록이지만 1위인 류현진과의 격차가 너무나 크죠. 류현진이 92%의 QS 성공율을 기록한 데 비해 김광현은 30경기 중 20번으로 66.7%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QS+(7이닝이상 3자책이하)로 기준을 높이면 88%(22/25)와 30%(9/30)로 아예 비교자체가 불가능하죠.
하지만 김광현은 류현진보다 더 많은 경기에 출장해 더 많은 승수를 기록했습니다. 김광현이 등판한 시합에서 SK는 20승 1무 9패를 기록했습니다. 중요한 건 승률이 아니죠. 김광현이 류현진보다 5번 더 등판해 4승을 더 챙겼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류현진이 7~8이닝을 1~2실점으로 막는 투수라면, 김광현은 6~7이닝을 1~2실점으로 막는 투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전자가 더 좋은 투수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막상 선발투수가 저런 피칭을 했다고 쳤을 때 그 팀의 승률에는 별 차이가 없지요. 저런 에이스급 투수들의 경우는 경기당 1이닝을 더 던지는 것보다 더 많은 경기에 등판하는 것이 팀의 승률이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즌 막바지에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나 좌초하지만 않았다면, 그래서 예정대로 28~9경기 정도 등판했다면 MVP를 뽑는 투표에서도 당연히 류현진의 우세를 점쳤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거북이였던 김광현은 1위 팀의 에이스라는 부담감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며 높은 팀 기여도를 나타냈습니다.
둘 중 최고의 투수를 뽑으라면 0.1초의 고민도 없이 류현진을 뽑겠지만, MVP를 뽑으라면 꽤 오랜 고민 끝에 김광현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MVP라는 상의 취지에 좀 더 어울리는 선택이 아닐까 싶네요. ‘가장 가치 있는 선수 = 팀에 더 많은 도움을 준 선수’라고 생각하니까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다양한 의견을 댓글로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 카이져 김홍석[사진=한화 이글스, SK 와이번스, S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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