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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타임스 필진 칼럼

한국야구 드림팀의 역대 아시안게임 도전사

by 카이져 김홍석 2010. 11. 8.

야구가 아시안게임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것은 1994년 히로시마 대회 때부터다. 아마추어 대학 선발팀이 주축이 되어 치른 히로시마 대회에서 일본에 첫 우승을 내주며 아쉽게 은메달에 그친 한국야구는, 본격적으로 프로 선수들의 출전이 허용된 98년 방콕 대회부터 최정예멤버들을 출전시켜 아시아 정상을 호령하게 된다.

 

98년 방콕대회와 2002년 부산 대회에서 '드림팀'을 앞세워 연이어 정상에 올랐던 한국은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는 복병 대만과 사회인 야구팀이 주축이 된 일본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며 동메달에 그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은 한국야구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설욕의 무대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과 WBC에서의 연이은 4강 진출로 한국야구의 저력을 널리 알리기는 했지만, 4년 전 도하에서 당한 잊을 수 없는 굴욕은 여전히 상처로 남아있다. 야구가 정식종목에서 제외되며 올림픽에서 볼 수 없게 된 지금, 아시안게임은 야구대표팀 최정예 1진을 볼수 있는 유일한 대회 이자 미필자 선수들에게는 병역혜택이 걸려있는 귀중한 대회이기도 하다.

 

94년 히로시마 대회 - 아쉬운 준우승

 

흔히 아시안게임하면 프로선수들이 처음 출전했던 방콕 대회를 먼저 떠올리는 팬들이 많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히로시마 대회 역시 쟁쟁한 멤버들로 구성되어있었다. 아마추어라고는 하지만 문동환, 임선동, 조성민, 손민한 등 유독 걸출한 투수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던 90년대 초중반의 대학선발팀은 프로와 견줘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야구대표팀은 조별예선에서 대만과 몽골을 각각 9-0 20-0으로 대파했고, 준결승전에서는 중국을 14-0 콜드게임으로 제압하며 단 1점도 내주지 않고 결승까지 올랐다. 마지막 상대는 역시 일본, 한국은 에이스 문동환과 조성민을 모두 투입하며 일진일퇴의 공방을 펼쳤으나, 3-2로 역전에 성공한 상황에서 7회 뼈아픈 수비실책이 겹치며 다시 재역전을 허용했고 결국 5-6으로 분패했다. 잘 싸웠지만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경기였기에 아쉬움이 남았던 은메달이었다.

 

98년 방콕 대회 - 드림팀의 기원

 

한국야구사상 '드림팀'의 원조로 꼽히는 첫 대표팀이다. 프로선수들의 출전이 허용된 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야구는 국내 프로와 아마선수는 물론이고, 당시 유일한 메이저리거였던 박찬호까지 불러들여 역대 최강의 대표팀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방콕 AG 대표팀을 지금도 역대 최고로 꼽는 이유는 멤버도 멤버지만 팀워크나 동기부여 면에서 가장 끈끈한 모습을 보여줬고, 실제 경기에서도 시종일관 압도적인 모습으로 우승까지 차지했기 때문이다. 최고의 선수들이 국가를 위해 뭉쳤다는 자부심과 미필자 선수들에게 따르는 병역면제 혜택은 선수들이 하나의 목표를 위하여 똘똘 뭉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방콕 대회의 한국대표팀은 두 자릿수 득점과 콜드게임이 속출하는 타격전 양상이 강했는데, 그것은 프로와 달리 국제대회에서는 알루미늄 배트가 허용되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국은 예선 첫 경기에서 대만을 16-5로 대파했고, 2차전에서는 일본과 접전 끝에 13-8로 승리했다. 드림팀이 가장 고전했던 경기는 예선 2차 리그에서의 대만전으로, 한국은 막판까지 대만의 추격에 진땀을 흘렸으나 8회부터 선발 박찬호를 마무리로 등판시키는 초강수를 선택한 끝에 5-4 1점차의 진땀승을 거뒀다.

 

토너먼트는 오히려 수월했다. 준결승에서는 김병현이 8연속타자 탈삼진과 6이닝 무실점의 완벽투를 펼친데 힘입어 9-2의 완승을 거뒀다. 결승에서 다시 만난 일본에게는 박찬호의 완투와 초반 타선 폭발에 힘입어 13-1 콜드게임으로 완승을 거두며 사상 첫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완성했다.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한국야구에 많은 의미를 지닌다. 병역문제를 해결한 박찬호는 이후 메이저리그 정상급 투수로 성장하며 전성기를 맞이했고, 이병규, 김병현, 김동주, 홍성흔, 진갑용 등 많은 선수들이 프로무대에서 최고의 스타로 성장하며 한국야구 중흥의 기틀을 닦았다. 아시안게임에서 최정예멤버로 구성된 한국야구의 성장을 확인한 일본이 위협을 느끼고 한국을 라이벌로 인식하게 된 것도 달라진 부분이었다.

 

2002년 부산 대회 - 챔피언의 저력 속에 남겨진 불안감

 

2002년은 한국 스포츠사에 기념비적인 족적을 남긴 해로 꼽힌다. 안방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축구대표팀이 4강 신화를 작성했고, 농구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중국에 기적 같은 역전승을 거두며 20년만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구기종목을 대표하는 또 다른 인기스포츠인 야구도 여기에 빠질 수 없었다.

 

지난 방콕 대회에서 드림팀의 위력을 확인한 한국야구는, 안방에서 열린 부산에서 챔피언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최정예 멤버들을 소집했다. 박찬호와 김병현 등 소집이 어려웠던 해외파 멤버들은 제외되었지만 이승엽, 이종범, 이상훈, 이병규 등 국내 프로야구 최고 선수들이 모두 합류했으며 사령탑도 처음으로 프로 출신인 김인식 당시 두산 감독이 맡았다.

 

한국은 중국(8-0), 대만(7-0), 일본(9-0)으로 이어진 조별리그 3경기에서 연이어 무실점 완승을 거두며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쉬운 승리가 오히려 독이 되었을까? 약체 중국과의 준결승에서 방심하다가 중반까지 고전했고, 뒤늦게 터진 타선의 힘으로 7-2 승리를 거두며 한숨을 돌렸다.

 

대만과 다시 만난 결승전은 예선과 달리 치열한 접전이었다. 한국은 대만 투수들의 스피드에 눌려 안타수에서 4-8로 두 배 차이의 열세를 보이며 고전했으나, 결정력에서 한 수 앞섰다. 김인식 감독은 박명환에 이어 임창용-송진우를 올리는 특유의 계투작전을 통하여 중반 이후 대만의 타선을 봉쇄했고 4-3, 1점차의 진땀승을 거두며 아슬아슬하게 대회 2연패에 성공했다.

 

대만은 경기 후 심판의 스트라이크존 판정에 격한 불만을 토로하며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챔피언의 자존심은 지켰지만, 대만야구의 성장과 줄어든 전력차는 4년 후 도하 아시안게임의 비극을 예고한 전주곡과도 같았다.

 

2006년 도하 - 한국야구사 최대의 굴욕

 

굳이 아시안게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한국야구의 국제무대 도전사를 통틀어 가장 치욕적인 장면 중 하나로 기억되는 대회다. 연초에 열린 2006년 초대 WBC 대회 4강으로 야구열기가 정점에 달해있던 한국야구는 내친김에 아시안게임 3연속 우승을 노리고 이번에도 프로 선수로 구성된 대표팀을 파견했다. 사령탑은 2000년대 현대 왕조의 4회 우승을 이끌었던스몰볼의 대가김재박 감독이 맡았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병역미필자 위주로 선발된 대표팀은 선수구성과 조직력 면에서 문제를 드러내고 있었다. 한 수 아래로 생각했던 대만과, 사회인 야구선수들을 위주로 결성된 일본의 전력을 과소평가했던 자만심도 화를 부채질했다.

 

결승전 없이 풀리그로만 치러진 도하 대회에서 한국은 첫 경기인 대만전을 2-4로 패한 데 이어, 일본과의 두 번째 경기에서 류현진, 오승환 등 최고투수들을 모두 내보내고도 7-10의 충격적인 역전패를 당했다. WBC를 시작으로 프로야구 장기레이스까지 1년 내내 강행군을 이어온 대표팀의 주력 선수들이 대부분 컨디션 관리에 문제를 드러냈다는 점이 치명타였다, 여기에 상대팀을 경시한 전력분석의 소홀과 중동 기후에 대한 현지적응 실패 등이 겹치며 최악의 재앙을 만들어낸 셈이다.

 

한국은 남은 경기를 전승하며 겨우 동메달을 따냈지만, 실질적으로 아시안게임에서 제대로 된 야구팀이 대만, 일본까지 단 3팀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꼴찌나 다름없는 결과였다. 그것도 프로 선수를 망라한 최정예 멤버를 구성하고도 보여준 졸전으로, 야구팬들 사이에서 "일본 세탁소 주인이나 정비공보다도 못한 한국 프로야구 올스타"라는 자조 섞인 비아냥을 들어야만 했다.

 

2010년 광저우 – ?

 

4전 전의 빚을 갚기 위해 작년부터 KBO와 기술위원회는 이번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해왔다. 이번 대표팀은 병역 문제에 크게 구애 받지 않고 최고의 선수들을 대거 선발했으며, 사령탑도 지난해 우승팀인 KIA 조범현 감독으로 일찌감치 결정되어 있었다.

 

김광현이 예상치 못한 안면마비 증상으로 대표직을 사퇴했지만, 우여곡절이 많았던 임태훈이 합류하면서 동기 부여나 사기 진작의 측면에선 나쁠 것이 없다. 국민들은 이번 대표팀이 대만과 일본을 연파하여 4년 전의 굴욕을 속 시원히 갚아주길 기대하고 있다.

 

// 구사일생 이준목[사진=삼성 라이온즈, 두산 베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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