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이었던 걸로 기억이 납니다. 당시 메이저리그 시범경기에서는 한국의 야구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흥미로운 이벤트가 벌어졌었습니다. 사상 최초로 메이저리그의 공식경기에서 두 한국인 투수가 선발 맞대결을 펼쳤기 때문이죠.(시범경기도 어디까지나 사무국에서 주관하는 ‘공식전’입니다.)
LA 다저스와 뉴욕 메츠의 시범경기에서 다저스 선발로 박찬호가 나오자 바비 발렌타인 당시 메츠 감독은 서재응을 선발로 예고해 두 선수의 맞대결을 성사시켰습니다. 박찬호야 이미 팀의 주축 선발투수 중 한 명이었지만, 사실 그때의 서재응은 시범경기라 하더라도 선발로 등판할 정도의 레벨은 아니었죠. 그런데도 그를 선발로 내세운 것은 한국의 야구팬들을 고려한 발렌타인 감독의 배려(혹은 메이저리그 특유의 상술)였습니다.
당시 경기에서 박찬호는 서재응을 상대로 타석에서 대형 홈런까지 터뜨리며 완승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중요치 않았습니다. 두 한국인 투수가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 선발 맞대결을 펼쳤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었으니까요. 그 소식을 듣고 경기장을 찾은 수많은 교포들은 물론, 한국에서 그 소식을 전해들은 야구팬들 역시 흥분을 감추기 어려웠습니다.
13년이란 시간이 지나 이번에는 한국 프로야구의 시범경기에서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선발 맞대결이 펼쳐졌습니다. 15일 대전에서 열린 한화와 SK의 시범경기 시합에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두 명의 좌완 투수인 류현진과 김광현이 나란히 선발로 등판했기 때문이죠.
이 매치업이 예고된 순간부터 언론이 주목하기 시작했고, 팬들 역시 상당한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결국 그 시합은 시범경기답지 않게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경기의 결과 역시 속보로 타전되어 팬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류현진의 판정승’이라는 결과로 말이죠.
네! 그렇게 끝났습니다. 수많은 야구팬들이 그토록 원했던 두 괴물의 첫 매치업은 이렇게 시범경기라는 무대에서 얼렁뚱땅 끝나버리고 말았던 겁니다. 이미 일어난 일이고, 과거가 되어버린 터라 되돌릴 수도 없는 그런 사건이 된 것이죠.
그래서…
화가 납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화가 납니다. 정말 미치도록…
류현진이라는 초특급 울트라 괴물이 나타나고, 그 뒤를 이어 김광현이라는 또 한 명의 괴물이 등장하여 최정상급 투수로 성장하면서, 지난 3년이란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야구팬들이 그토록 갈망하고 원했던 최고 매치업의 ‘첫 대결’이 시범경기라는 시시한 무대에서 그냥 물거품처럼 의미 없는 이벤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13년 전 박찬호와 서재응의 맞대결은 정규시즌에서는 성사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습니다. 기획부터 실행까지의 모두가 팬들을 위한 ‘이벤트’였기에, 지켜보는 팬들 역시 그 맞대결 자체를 기꺼워하고 즐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의 류현진과 김광현의 맞대결도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재작년, 그리고 작년, 그토록 팬들이 둘의 맞대결을 원할 때는 갖은 변명을 해가며 어긋나게 만들더니, 고작 시범경기에서 그들을 맞붙게 하다니요?? 김성근 감독님, 그리고 한대화 감독님, 정말 이렇게까지 하셔야 했습니까? 겨우 이런 걸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나요?
류현진의 판정승이라고요? 웃기지도 않네요. 그 시합에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 결과에 무슨 의의를 부여한단 말입니까! 고작 그런 시합을 두 괴물의 ‘첫 맞대결’로 역사에 남기고 싶으신가요? 대체 그 경기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물론, 언젠가는 두 선수가 정규시즌에서 맞붙는 날이 오겠죠. 그리고 진짜 승부는 거기서 가려지겠지요. 하지만 그게 진정한 ‘첫 대결’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공식 기록에 남는 첫 맞대결은 그 경기가 되겠지요. 하지만 100년 된 와인을 개봉한 후에 마시지는 않고 향만 음미한 후에 그걸 다시 밀봉한다고 해서 그 가치가 보존되나요?
이번 시범경기의 결과는 언제까지고 두 선수의 매치업 역사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겁니다. 두 선수의 실질적인 첫 대결은 정규시즌이 아닌 시범경기였다고 말이죠. 대체 이 찜찜한 기분은 어쩔 겁니까?
류현진과 김광현,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두 젊은 괴물의 맞대결은 순백색의 설원과도 같았습니다. 그 누구도 밟지 않았기에 그 첫 맞대결이 가지는 가치가 너무나 대단했던 것이지요. 적어도 저는 그 첫 맞대결이 모든 야구팬들이 인정할 수 있는 정규시즌(혹은 포스트시즌) 경기이길 바랬습니다. 거기서부터 두 괴물이 함께 만들어가는 각본 없는 드라마가 의미 있는 발자취가 되어 한국 야구사에 길이 남길 바랬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와인은 개봉되고 말았습니다. 살짝 냄새만 맡고 다시 밀봉했기에 그 양은 전혀 줄지 않았다지만, 그 한 번의 개봉으로 인해 이미 그 와인의 가치는 예전과 같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기록에는 남지 않지만, 이미 그걸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분통이 터집니다.
정말… 한국 야구사에 길이 남을 두 괴물의 맞대결을 이런 식으로 보고 싶진 않았습니다. 고작 이런 무대에서 벌어진 두 선수의 ‘첫 맞대결’이 기억 한 편에 남지 않기 바랐습니다. 그런데 이미 원래의 코르크는 처참하게 구멍이 뚫린 후고, 그 향은 코끝에 맴돌고 있네요. 참 씁쓸한 향으로 말이지요.
// 카이져 김홍석[사진제공=한화 이글스, SK 와이번스]
P.S. 야구에 미친 한 정신나간 팬이 필요이상으로 ‘오버’한다고 비난하셔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류현진과 김광현이 같은 날 같은 경기장에서 같은 마운드에 오르는 모습을 시범경기에서 처음으로 보고 싶진 않았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정말 짜증나는 기억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