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브‘하면 떠오르는 선수는 누가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한국 프로야구의 레전드인 최동원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그가 은퇴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의 낙차 큰 커브는 여전히 팬들의 뇌리에 뚜렷하게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아 있는 커브는 메이저리그 경기 속에서였다. 그 커브의 주인공은 지난 시즌 월드시리즈 챔피언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소속의 배리 지토다.
193cm에 달하는 장신, 그리고 좌완이라는 이점은 항상 우완 중심인 중계 화면 속에서 마치 폭포수와 같이 떨어졌다. 이건 도무지 사람의 손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공처럼 보였다. 지토의 커브를 맞이하는 좌타자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공을 피하려고 움찔거리다가 어느새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해야만 했다.
물론, 이 모습은 4~5년전 오클랜드 소속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당시의 모습이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지토는 ‘먹튀’ 중 한 명으로 전락한 상태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토가 최고의 커브를 던졌던 투수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국내 프로야구에도 팬들로부터 지토의 이름을 별명으로 선물 받았을 정도로 좋은 커브를 던지는 투수가 바로 두산에 있다.
2008시즌 당시 두산의 선발진은 상황이 좋지 못했다. 그냥 암담했다는 말이 더욱 적합할 듯싶다. 이전 시즌 리그 최고의 에이스로 우뚝 선 리오스가 일본으로 훌쩍 떠나버렸고, 리오스의 뒤를 받쳐주던 랜들(9승)은 10승 문턱을 넘지 못했으며, 박명환의 뒤를 이은 토종 에이스로 자리매김해 줄 것으로 믿었던 김선우는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성적으로 실망만을 안겨줬었다.
나머지 선수들 역시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금은 두산의 핵심 불펜 투수지만 당시 정재훈은 잠시나마 선발투수로의 외도를 경험했다. 초반 성적은 괜찮았으나, 풀타임 선발 경험이 없는 정재훈의 밑천은 머지않아 드러나고 말았다. 그러한 와중에 두산이 투수진에서 거둔 유일한 수확이 바로 ‘김지토’ 김상현의 발견이다.
이전까지 팀 내에서 김상현의 존재감은 아주 미미했다. 그랬던 그가 좋은 제구력과 낙차 큰 커브를 바탕으로 2007년부터 서서히 팀 내 입지를 늘려가더니, 2008년을 통해서 팀 내 핵심 불펜 투수로 성장하게 된다. 당시 김상현은 2.4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고, 이는 팀의 필승조로 활약 중이던 임태훈(3.41)보다도 훨씬 뛰어난 성적이었다.
하지만 2009년에 시도했던 선발 전향이 실패로 돌아가고, 2010년에는 부상으로 단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하면서 팬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져 갔다. 경기에 나오지 않으니 김상현이 더 이상 마운드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근거도 없는 괴소문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상현은 다시금 1군에 복귀했고, 2011년 팀의 불펜에서 날아오를 준비를 마쳤다.
김상현의 장점이라 한다면 역시 낙차 큰 커브를 꼽을 수 있겠다. 무리하게 슬라이더의 비중을 높이다가 결국 밸런스가 무너졌고, 그 결과 주무기인 커브마저 위력을 잃어버리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던 09시즌과는 달리, 올 시즌의 김상현은 다시 커브를 주무기로 타자들을 상대해 나가고 있다.
간간히 슬라이더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경우의 수를 늘려 타자와의 수싸움에서 앞서기 위한 방법일 뿐, 어디까지나 주는 커브다. 게다가 김상현의 경우 슬라이더도 만만히 볼 수 없는 위력을 갖추고 있다. 2009년에 슬라이더의 비중을 높였던 것도 그만큼 예리하게 꺾여 들어갔기 때문이다. ‘커브의 달인’이 슬라이더라는 보조 무기를 손에 넣었고, 이제는 그것을 제대로 활용할 줄도 아니 타자들의 입장에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올 시즌 1군 무대에 복귀한 김상현은 지금까지 5경기에 출장해 8이닝을 던졌고, 단 한 점도 내주지 않는 뛰어난 피칭을 보여주고 있다. 김상현이 올라오면서 지난해까지 마무리로 활약하던 이용찬이 2군으로 내려가긴 했으나, 두산의 불펜진은 여전히 위력적이다.
지난 해 리그 최강의 불펜 듀오였던 정재훈-고창성이 건재하고 12일 경기에서 올 시즌 새로운 마무리 투수로 낙점된 어리지만 경험 많은 임태훈도 버티고 있다. 선발진이 다소 불안하지만 김상현이 이대로 불펜에 연착륙해준다면, 김경문 감독이 밝힌 ‘불펜 강조론’을 토대로 얼마든지 승리를 낚을 수 있다.
19일 경기에서는 0.2이닝 동안 2안타를 허용하며 다소 쑥스러운 홀드를 기록했지만, 지금까지의 김상현은 시속 140km 초반의 패스트볼과 낙차 큰 커브, 그리고 간간이 섞어 던지는 슬라이더로 타자들을 비교적 쉽게 공략하고 있다. 더구나 김상현은 기본적으로 제구력이 우수한 선수다. 강속구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꽂아 넣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2008년 이상의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이다.
한 때, 장성호와의 트레이드설에 휘말리며 팀을 떠날 뻔 했던 김상현. 개인적으로 당시에는 포스트시즌도 앞두고 있는데다, 당장 김상현을 활용할 수 없기에 그 트레이드가 성사되길 바랐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당시의 내 생각이 아주 멍청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올 시즌의 김상현이 깨닫게 해주길 기대해 본다.
// 버닝곰 김성현 [사진=SI.com, 두산 베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