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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타임스 필진 칼럼

‘비운의 투수’ 강철민, 끝내 피지 못하고 지다

by 카이져 김홍석 2011. 5. 25.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야구대표팀은 한국야구사의 첫드림팀으로 기억된다. 박찬호, 김병현, 서재응, 임창용, 이병규, 김동주, 홍성흔, 진갑용 등 지금 봐도 쟁쟁한 선수들이 주축이었던 대표팀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 화려한 드림팀의 명단 속에강철민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당시 김병현, 경헌호, 황우구, 장영균 등과 함께 대학생 신분으로 아시안게임 무대를 밟았던 강철민은 한양대의 에이스이자 차세대 유망주로 촉망 받던 투수였다.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병역혜택까지 받은 강철민의 미래는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하지만 13년이 흐른 현재, 그의 이름은 이제 강혁과 더불어 방콕 아시안게임 출신임에도 빛을 보지 못한비운의 선수명단에 올려야 할 듯하다.

 

강철민은 순천효천고 시절부터 대형 투수로 주목 받았다. 한국야구 역대 최고의 테크니션 중 한 명으로 평가 받는 장호연(전 두산)이 그의 효천고 시절 은사였다. 190cm가 넘는 장신에 파워 넘치는 강속구를 내리꽂던 강철민은 고교 졸업과 당시 해태( KIA)에 고졸 우선지명을 받았을 정도로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선수였다.

 

그러나 IMF로 인하여 구단의 재정적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강철민은 프로 진출을 잠시 유보하고 한양대로 진학했다. 대학무대에서도 2000년 대학야구 추계리그와 이듬해 대학선수권대회에서 각각 최우수선수(MVP)에 올랐고,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비롯하여 4년 내내 아마야구 국가대표로 활약하는 등 변함없는 기량을 뽐냈다.

 

재정난에 시달리던 해태 타이거즈가 KIA로 인수된 후, 강철민은 2002년 계약금 5억원이라는 거액을 받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호랑이군단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많은 야구전문가들은 강철민을 2~3년 내에 호랑이군단의 에이스 계보를 이을 기대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철민의 야구인생의 전성기는 아쉽게도 대학까지였다. 강철민은 데뷔 첫해 26경기(선발 16경기)에서 5 6, 1홀드, 평균자책점 5.68을 기록했다. 입단 동기였던고졸 대형 신인김진우가 역대 최고 몸값인 계약금 7억원을 받고 KIA에 입단하여 12 11패 평균자책 4.07의 성적을 올린 데 가려져서 크게 주목 받지도 못했다.

 

강철민은 2003 6(평균자책 4.88)에 이어 2004년에는 8(5.33)을 거뒀다. 기대치에 비하면 더딘 성장이었지만, 그래도 매년 상승곡선을 그리며 꾸준히 자리를 잡아가던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역시 부상이었다. 허리 통증 등 잔부상에 시달리며 2005년과 2006년 각각 3승에 그친 그는 2006년 팔꿈치 부상으로 인대 접합수술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기나긴 부상과 재활의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2007년부터 3시즌간은 아예 1군에서의 공식적인 등판 기록이 없었다. 심지어 한국야구위원회의 야구연감에서도 강철민의 이름이 빠져있다. 팔꿈치뿐 아니라 발목과 어깨까지 전염병처럼 번진 부상 때문이었다. 그 결과 강철민에겐 팬들이 붙여준고스트(유령)’, ‘사이버(가상) 투수’, ‘신비주의 야구선수같은 부정적인 닉네임이 줄줄이 따라 붙였다. 한마디로 명단에는 있는데 정작 실제로 경기장에서는 볼 수 없는 선수라는 의미다.

 

강철민을 가르쳤던 지도자들은 그래도 그의 재능을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다. 서정환 전 KIA 감독은정신적인 약점만 극복하면 충분히 10승 이상을 거둘 수 있는 투수라고 평가했으며, 조범현 현 감독도윤석민, 양현종과 함께 KIA 마운드를 이끌어나갈 선수로 기대를 걸었다. LG로 옮긴 후에도 박종훈 감독이투수의 재능은 어느 정도 타고나야 하는데, 강철민의 자질은 어떤 에이스급 투수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며 아쉬워했을 정도다.

 

2009 4월 강철민은 김상현 박기남과 21 트레이드를 통해 LG 유니폼을 입게 된다. 부상 이후 거의 잊혀져 가던 강철민이라는 이름이 다시 세간의 화제에 오른 유일한 순간이었다. KIA에 둥지를 튼 김상현이 팀의 우승을 이끌며 시즌 MVP를 차지할 정도로 맹활약했지만, 정작 강철민은 그 해 단 한번도 1군 경기에 등판하지 못했다. KIA 입장에서는 최고의 트레이드였지만, LG조공 트레이드라는 팬들의 비난에 시달려야만 했고, 그 중심에 있었던 강철민은 더욱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2010년 절치부심한 강철민은 시즌중반 마침내 그라운드에 복귀하는데 성공하지만 3경기에서 11 2/3이닝을 던지고 1패만을 기록한 채 다시 부상이 악화되며 시즌아웃되고 말았다.

 

강철민은 매년 소속팀 관계자들에게 희망고문을 안기던 선수였다. LG 관계자는스프링캠프 때는 정말 놀랄 정도로 공이 좋았다. 1~2년 전만해도 본인이 반드시 부활하겠다는 의지가 강했고, 감독님도 기대가 컸다. 하지만 몸 상태가 어느 정도 올라왔다 싶으면 다시 부상이 악화되면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상황이 반복되고, 세월이 흐르며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고 아쉬워했다.

 

LG가 이번엔 강철민을 방출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은 어깨 부상으로 인하여 수술과 재활까지 다시 1년 가량 시간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왔기 때문이다. 강철민의 나이(79년생)나 그간의 활약을 감안할 때 재기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사실 강철민은 이미 시즌이 개막하기 전부터 수술과 재활 사이에서 빠른 결단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었지만, 구단은 계속 망설이다가 결국 시즌 중 방출로 강철민과의 인연을 정리했다. 차라리 방출이든 수술이든 결정이라고 빨리 내렸더라면, 강철민으로서는 좀더 일찍 몸과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KIA LG에서 남긴 통산 성적은 25 36 1세이브 2홀드 평균자책점 4.86. 90년대 후반 최고의 유망주로 꼽히며 방콕 아시안게임 영광의 주역이었던 선수가 남긴 성적표로는 너무나도 아쉬운 기록이다.

 

강철민은 LG의 방출 결정에 시원섭섭한 반응을 보이면서그래도 아직 야구를 포기하지 않았다.”며 불확실한 미래에 다시 한 번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많은 팬들에게 안타까움과 실망을 주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에게 따뜻한 격려가 필요한 순간이 아닐까.

 

// 구사일생 이준목 [사진제공=KIA 타이거즈, LG 트윈스, 기록제공=Stat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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