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6월 23일, 지금부터 20년도 전인 이 날은 훗날 김홍석이라는 한 사람이 인생의 진로를 결정짓게 되는 그 첫 걸음이 되는 중요한 날입니다. 바로 이날의 소중한 추억 덕분에 20년이 지난 지금, 전 야구에 관한 글을 쓰면서 야구 전문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초등학교(실제론 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전 운 좋게도 학교 대표로 ‘전국 수학 올림피아드’에 출전하게 되었고, 시험을 치르기 위해 아침 일찍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과 멀리 떨어진 어떤 학교로 갔었습니다. 시험을 다 치고 나오자 점심 때가 되었고, 그때까지 절 기다리고 계시던 아버지께서는 “재미있는 거 보러 가자”며 저를 어디론가 데리고 가시더군요.
그곳이 바로 사직구장이었습니다. 때마침 시험장이 사직에 있는 한 학교였고, 정말 운 좋게도 1991시즌의 프로야구 올스타전이 그날 사직구장에서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겁니다. 아버지는 절 기다리는 동안 구장에 가서 표를 구해오셨고, 아들에게 좋은 추억을 안겨주고자 야구 경기를 보여주기로 결정하신 겁니다.
생소한 경험이었습니다. 제 어린 기억 속의 아버지는 늘 바쁜 분이셨고, 아버지와 둘이서 어디론가 갔던 기억은 주말마다 갔던 목욕탕을 빼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절 사람이 굉장히 많은 복잡한 곳으로 데리고 가셨고, 거기가 바로 야구장이었습니다. 사직구장 근처에서 냉면을 먹고, 입장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만 해도 전 프로야구의 ‘프’자도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한창 열을 올리던 최고의 스포츠(?)는 ‘구슬치기’와 ‘스트리트 파이터-2’였습니다. 사실 프로야구는 제 관심 밖이었죠. 롯데라는 팀이 부산을 연고로 한다는 것조차 전혀 모르던 시절이니까요.
그런데 그 분위기가 너무 맘에 들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큰 구장에 모여서 목소리를 높여 응원하는 장면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그걸 바라보는 것 자체로 흥분이 되고, 심장이 뛰더군요. 그리고 제 옆에 앉으신 아버지도 누군가를 큰 소리로 응원하셨습니다.
저도 같이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어린이가 그렇듯, 저 역시 ‘우리편’이 누군지가 궁금했습니다. 아버지께 여쭤봤더니 ‘동군’이 ‘우리편’이라고 하더군요. 사실 진짜 우리 편은 ‘롯데 자이언츠’라는 부산을 대표하는 팀인데, 지금은 ‘연합군’이 만들어졌고, 그래서 롯데가 포함된 ‘동군’이 우리편이라고 말이죠.
바로 그 올스타전에서 동군의 중심타선으로 선발 출장한 선수가 당시 롯데 소속이었던 장효조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장효조가 바로 연합군에서도 제일 실력이 뛰어난 최고의 선수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편’인 롯데 소속의 선수가 ‘연합군’에서도 대장이었던 겁니다. 알 수 없는 뿌듯함마저 느껴지더군요.
당시 올스타전에서는 롯데 선수들이 꽤 많이 출장했었고, 그들 대부분이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MVP로 선정된 김응국을 비롯해, 롯데 선수들이 전체 득점의 절반 이상을 만들어 내면서 동군의 10-6의 승리를 이끈 것이죠.
하지만 저한테는 ‘누가 제일 잘했나’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제게 중요한 건 아버지가 최고로 인정하는 선수가 누구냐는 것이었고, 그 주인공은 바로 장효조 선수였으니까요. 그때부터 장효조라는 이름 석자는 제게 있어 특별한 의미가 되었습니다.
제가 야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습니다. 그 해 롯데는 4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아버지는 그 사실을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준플레이오프에서 롯데 박동희와 삼성 성준이 만들어낸 숨막히는 투수전은 저를 야구의 매력에 푹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정규방송 관계로 TV 중계가 끝난 다음, 아버지와 함께 라디오를 켜놓고 3-3 무승부로 끝난 그 경기를 끝까지 사수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이듬해, 롯데는 사상 2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합니다. 비록 그때의 장효조는 전년도와 달리 큰 활약을 펼치지 못했고, 이미 롯데의 4번 타자 자리도 ‘자갈치’ 김민호에게 넘겨준 후였지요. 하지만 장효조란 이름은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롯데 경기를 볼 때마다 아버지께서 장효조에 관한 전설을 약간의 과장을 섞어서 설명해주셨으니까요.
롯데의 마지막 우승인 1992년, 그 해는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은 친다’던 장효조가 한국 프로야구에서의 10년 선수생활을 마감한 해이기도 합니다.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장효조가 내릴 수 있는 적절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죠.
그렇게 2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추억을 남기고 장효조는 떠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장효조가, 즉 80년대의 장효조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였는지를 알게 되는 건 그로부터 한참의 세월이 지난 후였죠. 80년대의 장효조는 정말 ‘전설’이라는 말로도 표현이 부족한 최고의 선수였으니까요.
언젠가는 그가 ‘장효조 감독’이 되어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프로 1군 감독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고, 2011년 9월의 어느 날 이렇게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가고 말았네요.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어렸을 때부터 간직해온 소중한 무언가가 부서지는 느낌…?
장효조 삼성 2군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후 하루 종일 20년 전 올스타전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계속 감상에 빠지게 되더군요. 어렸을 적 제가 가장 좋아했던 박동희가 세상을 떠난 날, 임수혁이라는 비운의 스타가 유명을 달리했을 때, 그리고 또 한 명의 영웅 장효조가 가버린 2011년 9월 7일…
팬들은 추억을 먹고 삽니다…
그 추억이 있기에 행복하고…
그 추억 때문에 그분의 사망 소식에 눈물이 납니다…
제 기억 속에는 언제나 20년 전 그 모습으로 남아 있을 장효조 선수…
20년 전 당신을 만났기에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안녕히... 안녕히…...
// 카이져 김홍석, 떠나간 ‘우리편 대장’을 추억하며…
P.S. 맥주를 한잔 해서인가… 글을 쓰는데 왜 이렇게도 눈물이 나는지…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