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호(오릭스)의 넉살 좋은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이대호는 최근 오릭스 선수단과 함께 구단주가 주최하는 회식에 참석했다. 구단주는 물론이고 코칭스태프와 전체 선수단, 구단 직원들까지 100여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외국인 선수인 이대호를 향해 미야우치 구단주가 “지내기 어떤가, 훈련은 할만한가”고 말을 건넸다. 거액을 들여 영입한 외국인 선수의 동향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구단주로서 당연지사. 하지만 선수 입장에서는 어느 장소이건 윗사람을 함께하는 자리는 약간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여느 선수 같으면 의례적인 질문에 적당히 의례적인 답변을 하고 말았을 테지만 이대호는 달랐다.
“매일 아주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 그런데 구단주께서 오시니 연습시간이 짧아져 살맛이 난다. 앞으로는 자주 연습을 보러 와주셨으면 좋겠다”며 능글맞은 멘트를 날렸다. 생각지도 못한 뻔뻔한 농담에 모두들 어안이 벙벙해진 것도 잠시, 이내 사람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지면서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미야우치 구단주는 껄껄 웃으며 ‘멋진 친구’라고 이대호의 넉살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보통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만 가득한 곳에 이방인이 혼자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위축되기 십상이다. 그것도 선수가 팀의 구단주에게 함부로 ‘농담 따먹기’를 한다는 것은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상상하기 힘든 일인 게 사실. 그러나 아직 낯선 자리의 서먹함이 가시기도 전에 특유의 붙임성과 재치로 분위기에 녹아들 줄 아는 것이 이대호의 매력이기도 하다.
이 에피소드는 별일 아닌 듯 보여도, 이대호가 처음 맞이하는 낯선 환경에서 주눅들지 않고 얼마나 잘 적응해나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롯데 시절부터 분위기메이커로 유명했던 이대호는 오릭스에서도 외국인 선수의 신분을 넘어 일본인 동료들과 허물없이 어울리고 있다. 포지션 경쟁자로 꼽히는 T-오카다와 함께 골프를 치는가 하면, 어린 일본선수들에게는 간간히 타격에 조언을 하기도 한다.
경기장 밖에서도 음식이나 환경에 대한 불평이 전혀 없다. 낯선 환경에 대하여 어색하고 불편한 것이 전혀 없지는 않으련만, 기왕이면 매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이대호 특유의 낙천적인 마인드가 묻어난다.
해외진출은 사실 기량만큼이나 선수의 성격이나 성향도 중요하다. 많은 한국인 스타들이 전성기에 일본무대에 도전장을 던졌다가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기량이 못 미치거나 운이 따르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현지 적응’의 실패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야구에 정통한 관계자는 “한국에서 어느 정도 성공하고 일본에 진출한 선수들은 대개 자아가 강하다. 타지에서는 자신도 외국인 선수이고, 그에 걸맞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새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선수들이 많다. 우리 나라에서도 용병들을 대할 때 ‘한국에서는 한국야구를 존중하라’고 이야기하지 않나. 같은 이치다”라고 지적했다.
이승엽이나 김태균은 일본무대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던 케이스로 꼽힌다. 그러나 이들도 일본무대에서 활약하는 내내 마음고생이 심했다. 가장 큰 이유는 성격문제였다.
이승엽은 겸손하고 성실했지만, 내성적이고 마음이 여렸다. 스스로 만족스러운 플레이를 보이지 못하거나 슬럼프에 빠졌을 때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김태균은 문화적-체질적으로 일본야구 환경이 잘 맞지 않았던 케이스다. 그도 체구에 비하여 사실 섬세하고 예민한 면이 많았다.
해외진출 이후에 마음고생이 심했던 선수들이 공통적으로 했던 이야기가 “일본야구에서 이방인으로서의 한계를 느꼈다.”는 것이다. 완벽주의적인 기질이 강한 선수들일수록, 잘나갈 때는 상관이 없지만, 반대로 잘 풀리지 않았을 경우에는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빈도도 강해진다.
이대호의 일본 적응 문제도 잘나갈 때가 아니라 힘든 순간에 진정한 평가의 시기가 찾아올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슬럼프는 찾아온다. 프로선수라도 누구나 일시적인 부진을 겪을 때가 있지만, 외국인 선수에 대한 평가의 잣대는 언제 어디에서건 더욱 가혹하다.
하지만 이대호가 앞의 두 선수와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면, 뻔뻔할 정도로 넉살이 좋고 털털한 성격이다. 롯데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던 팀 동료들은 이대호에 대하여 하나같이 “통이 크고 대범한 성격”이라고 입을 모은다. 자신감이 넘쳐서 때로는 건방져 보일 때도 있지만, 그만큼 생각도 깊고 신중한 일면도 있다. 워낙 긍정적인 성격이라 안 좋은 일이 있어도 마음에 오래 담아두지 않는다.
사직구장은 한국에서도 가장 극성맞은 팬들이 많은 곳이다. 이대호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하루도 빠짐없이 경기장을 찾아와 이대호를 욕하는 팬들이 있었다. 마치 이대호가 카메오로 출연했던 <해운대>의 한 장면 같은 일화다. 듣다 보면 정말 화가 날 법도 하건만, 이대호는 영화 속 장면과 달리 실제 현실에서는 관중석을 쓱 한번 쳐다보더니 헬멧을 벗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팬도 욕하던 것을 멈췄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장면이다.
용병으로 살아야 하는 해외무대에서는 국내에서보다 더한 정신적 압박감은 어쩌면 그림자 같은 것이다. 때로는 뻔뻔스러울 만큼의 당당함과 긍정적 마인드는 필수 요소다. 이대호가 만일 일본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면 그 절반의 원동력은 성격에서 나오지 않을까.
// 야구타임스 이준목 [사진=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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