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프로야구에서 6년간 활약하며 역대 최고의 외국인 타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혔던 로베르토 페타지니가 LG 트윈스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한국 프로야구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많은 팬들은 기대감 그가 꼴찌 LG를 구원할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일본에서 그만한 실적을 보여준 적이 있는 선수이기도 하다.
▶ 역대 최고의 경력을 자랑하는 외국인 타자
지난 10년 동안 수많은 외국인 선수가 한국 무대를 밟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경력을 자랑했던 타자는 삼성에 몸 담았었던 훌리오 프랑코다. 삼성을 떠나 메이저리그로 복귀한 후에는 최고령 선수로 유명세를 탔지만, 이미 한국 진출 전에 실버 슬러거 5회 수상과 올스타 전 3회 출장의 화려한 경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991년에는 0.341의 타율로 아메리칸 리그 타율 부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페타지니 역시 그와 비교해 손색이 없다. 리그는 다르지만 일본 프로야구 무대에서 6년 동안 최고 중의 최고로 군림했던 그도 ‘경력’이라는 면에서는 프랑코에 견줄 만하다. 적어도 메이저리그 올스타(1991년) 출신의 펠릭스 호세나 만년 유망주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일본에서도 2년 만에 퇴출되었던 카림 가르시아보다는 경력 면에서 한 수 위다.
그런 선수가 한국 땅을 밟았다는 것은 조금은 의외이긴 하지만, 한 때 메이저리그 20승 투수인 호세 리마(KIA)도 한국 무대에 진출한 마당에 페타지니라고 해서 안 될 이유는 없다. 전성기가 지난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이름값 있는 선수들이 하나 둘씩 한국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한때 일본 프로야구를 접수했던 사나이, 25세 연상의 대학 선배 어머니와의 결혼 생활, 선동렬 감독이 마지막으로 상대했던 타자 등으로 벌써부터 유명세를 타고 있는 페타지니.
과연 그는 LG 트윈스를 위기에서 구원할 만한 선수일까? 그가 지나왔던 길을 살펴본 결과,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페타지니는 알려진 것 이상으로 뛰어난 선수였다. 그것도 훨씬!
이번 칼럼에서는 페타지니가 과거 마이너리그와 일본 리그에서의 기록을 중심으로 그가 걸어왔던 길과 앞으로의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 92년~96년 : ‘유망주’의 허물을 끝끝내 벗지 못하다
이 칼럼을 쓰기 위해 페타지니의 과거 기록들을 찾아 찬찬히 살펴봤다. 그도 롯데의 가르시아처럼 마이너리그 트리플A와 메이저리그 사이의 벽을 극복하지 못해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성공하지 못한 아쉬운 선수 중 한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특히 트리플 A)의 차이는 쉽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어떤 선수에게는 정말로 별것 아닌 차이지만, 또 어떤 선수에게는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19살이던 1990년 휴스턴 에스트로스에 입단한 베네수엘라 출신의 소년 페타지니(1971년생)은 마이너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갔다. 타고난 방망이 감각을 지닌 그에게 3할 타율은 식은 죽 먹기였고, 타고난 선구안은 4할이 넘는 출루율을 보장해주었다. 5할 대의 장타율은 덤이었다.
1993년 더블A에서의 좋은 활약에 이어 94년에는 트리플 A에서도 완벽하게 적응했다. 하지만 그의 소속 팀은 페타지니를 메이저리그로 불러들이지 않았다. 문제는 그의 포지션이었다. 뛰어난 수비수가 아니었던 페타지니는 1루 밖에 볼 수 없었고 그것이 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당시 휴스턴의 1루에는 훗날 ‘팀 역사상 최고의 타자’라고 불리게 되는 제프 베그웰(통산 449홈런 1529타점)이 버티고 있었다. 베그웰은 ‘넘지 못할 벽’이라는 표현으로도 설명이 부족한 선수. 결국 페타지니는 대타로 8경기에 출장(7타수 무안타)한 것을 끝으로, 캔 캐미니티와 데릭 벨이 주축이 된 6:6 트레이드에 포함되어 휴스턴을 떠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가야만 했다.
샌디에이고에서 맞이한 95년, 그는 개막 로스터에 포함되며 기회를 잡았다. 붙박이 주전은 아니었지만, 좌타자라는 이점을 활용한 플래툰 1루수로 기용되기 시작했다. 아직도 24살,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기에 늦은 나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페타지니에게 메이저리그의 벽은 유난히 높게 느껴졌나 보다. 2할 대 초중반의 타율과 적은 홈런 개수는 유격수나 포수라면 모를까 1루수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또 다시 뉴욕 메츠로 보내졌다.
메츠에서도 패턴은 바뀌지 않았다. 마이너리그 성적에서의 성적은 뛰어났으나, 메이저로 불려 올라가기만 하면 방망이는 침묵했다. 트리플A에서 수준급 타격을 보여준다고 해도 메이저리그에서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페타지니는 보여주고 말았다. 그렇게 96년은 끝났고, 페타지니는 20대 후반에 접어들었다. 더 이상 그는 ‘유망주’라 불릴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 97년~98년 : 마이너를 완벽하게 제압했지만...
97년에도 트리플A에서 출발한 페타지니는 그야말로 마이너리그 최고의 타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성적을 뽐냈다. 신시네티에서 맞이한 98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저 2년 동안 마이너리그에서 페타지니보다 뛰어난 성적을 거둔 타자는 아무도 없었으며, 그는 2년 연속 트리플A 인터내셔널리그 MVP를 수상했다.
트리플A에서의 리그 MVP급 성적. 이 정도라면 메이저리그 구단에서도 기대를 하고 기회를 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페타지니가 빅리그 무대에 얼굴을 내밀기 위해서는 9월의 확장 로스터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당시 메츠와 레즈의 1루수는 존 올러루드와 션 케이시였다. 두 선수 모두 파워보다는 정확성으로 인정받은 선수인지라 파워까지 겸비한 페타지니가 밀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20대 후반에 접어든 마이너리거가 느껴야만 하는 비애다.
메이저리그에서 나이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중남미 계열의 선수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들의 나이를 속이는 것이 아니다. 그 1,2년 차이에 따라서 수천만 달러가 오고갈 때도 있다. 같은 30홈런 100타점 타자라도 그것을 22살 때 기록한 선수와 27살 때 기록한 선수는 대접이 다르다. 전자는 특급 유망주로 분류되어 메이저리그의 주전 자리를 보장받지만, 후자는 그럴만한 나이가 되어 마이너리그에서 전성기가 시작된 것일 뿐 메이저리그에서는 통하지 않는 선수라고 여기게 된다.
페타지니는 후자의 전형적인 케이스였다. 게다가 그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선수. 71년생이라는 것은 거짓말일 확률이 매우 높다. 적어도 2~3살 정도는 많다고 가정하면 대략 서른 안팎, 그런 선수에게 메이저리그의 타석을 보장한다는 것은 낭비에 불과하다. 차라리 성적은 나빠도 그보다 어린 유망주에게 기회를 주는 편이 팀의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된다. 레즈에서 74년생인 케이시에게 1루 포지션을 맡겼다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실제로 페타지니와 비슷한 유형의 선수들은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성공하지 못한다. 그들 대부분운 또 다시 메이저리그 적응에 실패하거나, 드물게 성공한다 해도 1,2년 반짝하고 사라지고 만다. 수많은 선수들이 그러한 길을 걸었고, 그 때문에 20대 후반의 마이너리거들은 당장의 선수 수급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수년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실패만을 맛본 26~27살(실제로는 28~30살)의 페타지니가 마이너리그에서 맹타를 휘둘렀다고 해서 빅리그 주전을 보장해주는 정신 나간 감독은 메이저리그에 없다.
그 결과, 어쩔 수 없이 페타지니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일본의 야쿠르트 스왈로즈 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렇게나 큰 복이 되어 돌아올 줄은 당시만 하더라도 몰랐을 것이다.
▶ 99년~04년 :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외국인 선수
이 기간 페타지니가 이루어낸 것들은 이미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입단 첫 해 6780만 엔을 받고 뛰었던 그는 4년 후 2년 동안 14억 4천만 엔을 받고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당시 페타지니가 받았던 연봉 7억 2천만 엔은 역대 일본 프로야구 최고 연봉 신기록으로써, 아직까지도 경신되지 않고 있다.(2위는 이승엽과 가즈히로 사사키의 6억 5천만 엔)
일본 시절 성적만 봐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두 번이나 홈런왕(99, 01)에 올랐고 2001년에는 센트럴리그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야쿠르트 시절의 페타지니는 4년 내낸 마쓰이 히데키와 비교될 만한 성적을 기록(페타지니 160홈런 429타점, 마쓰이 170홈런 414타점)했고, 마쓰이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자 요미우리에서는 그 대안으로 페타지니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거액의 돈다발과 더불어서.
마이너리그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각 팀들을 전전하던 선수가 700만 달러를 받는 선수가 되었다. 아쉬움 속에서 일본행 비행기를 탔던 페타지니가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타자가 되는 성공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요미우리 시절에는 부상 때문에 다소 부진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출장 경기 수를 감안한다면 역시나 무서운 성적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고질적인 무릎 부상 때문에 고생하던 페타지니는 점차 하향세를 그리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출장 경기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재계약을 할 시점이 되었지만 무릎의 부상은 회복을 장담할 수 없었고, 팀에서는 재계약 조건으로 고작(?) 연봉 3억 엔을 제시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페타지니는 다시 한 번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기 위해 보스턴 레드삭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참고로 요미우리가 페타지니 대신 보스턴 소속이던 게이브 캐플러를 영입했으나, 그는 수많은 문제만 일으키고 퇴출되었다.
▶ 메이저리그만 아니라면...
결과부터 말하자면, 페타지니의 메이저리그 도전은 역시나 또다시 실패였다.
2005년 레드삭스 산하 포투켓에서 74경기 만에 20홈런 69타점을 기록했지만 빅리그로부터의 호출은 없었다. 1루수 케빈 밀라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팀에서는 베테랑 1루수 존 올러루드를 영입했다. 공교롭게도 올러루드는 8년 전에 이어 또다시 페타지니의 앞길을 막아섰던 것이다. 시즌 말미가 되어 겨우겨우 빅리그 무대를 밟고 18경기에 출장했지만 1홈런 9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그의 빅리그 울렁증은 여전했고, 마이너에서 0.635를 기록했던 장타율도 빅리그에서는 0.438로 떨어졌다.
2006년에는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시범경기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개막 로스터에 포함되는 기쁨을 누렸다. 시즌 개막전에서는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를 상대로 홈런도 뽑아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31경기에서 고작 32번 타석에 들어선 페타지니는 27타수 5안타(0.185)의 부진한 성적을 기록한 후 팀에서 방출되고 말았다.
일본에서 비슷한 성적을 기록했던 마쓰이가 메이저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페타지니의 타격 재능은 결코 만만한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메이저리그와는 인연이 없었다. 아쉽지만 그것이 현실이었고, 페타지니가 가진 한계였다.
LG에 입단하기 전까지, 그는 멕시칸 리그(트리플A급)에서 뛰고 있었다. 멕시칸 리그는 투수력에 비해 타격이 월등히 우세하기 때문에, 그곳에서의 성적을 가지고 한국에서의 성공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페타지니는 타율 0.372 출루율 0.488 장타율 0.605의 뛰어난 비율 스탯으로 37경기에서 6홈런 27타점 29볼넷을 기록하고 있었다. 출루율은 리그 1위에 올라 있을 정도로 좋은 성적.
페타지니의 성공을 예감하게 하는 가장 큰 요소가 바로 볼넷을 골라내는 능력이다. 그의 정확도나 장타력은 메이저리그에서 통하지 않았지만 선구안만큼은 달랐다. 빅리그 통산 0.227의 타율에 불과하지만 출루율은 0.345나 된다. 438번 들어선 타석에서 63번이나 걸어 나간 결과였다. 게다가 그의 정확도와 장타력은 메이저리그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최정상급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선구안! 이것이 바로 페타지니를 롯데의 카림 가르시아보다도 더 뛰어난 평가할 수 있는 이유다. 적어도 수치상으로 그는 오클랜드 빌리 빈 단장의 ‘머니볼’ 이론에서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타자라고 할 수 있다.
올해 페타지니의 기록상 나이는 37세. 실제로는 그보다 좀 더 많다고 보는 편이 맞겠지만, 선수 생활 내내 트리플A급의 모든 리그에서 MVP급 성적을 뽐낸 그가 국내 프로야구에 적응하지 못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한 명의 선수가 새로 들어왔다고 해서 팀 성적이 180도 달라질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페타지니가 ‘한국에서도 성공한 외국인 타자’가 될 가능성은 과거의 그 어떤 선수들보다도 높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