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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져의 야구 칼럼/MLB Stories

두 얼굴의 구단주 월터 오말리

by 카이져 김홍석 2007. 11. 27.
 
전 LA 다저스의 구단주이자 메이저리그의 서부개척시대를 열었던 월터 오말리(Walter O’Malley)가 명예의 전당 후보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박찬호가 입단할 당시 다저스의 구단주로 있었던 피터 오말리의 부친인 월터 오말리는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 중 한명이다. 브루클린 다저스의 고문 변호사 출신인 월터 오말리는 1950년 다저스의 최대주주가 되면서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이후 오말리 가(家)는 1998년 아들 피터가 루퍼드 재단에 팀을 매각할 때까지 48년 동안 다저스를 운영해왔다.

90년대 후반 돈을 물 쓰듯이 쓰면서 메이저리그의 시장 경제를 흐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아들 피터와는 달리 아버지 월터는 역대 메이저리그 구단주 중 손꼽히는 업적을 남긴 사람 중 한명이다.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을 빅리그로 불러들인 것도 그의 업적이었고, 동부 팀 일색이던 50년대 후반 서부에 메이저리그를 가져다 준 장본인도 바로 월터 오말리였다.

그런 오말리에게 ‘두 얼굴의 구단주’라는 별칭을 붙인 이유는, 역사상 같은 미국 내에서 그만큼 다른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는 LA를 중심으로 한 서부의 영웅이었으나, 뉴욕에서는 시민들이 이를 부득부득 갈며 치를 떨었던 역적이었다.


▷ 뉴욕의 역적 월터 오말리

1958년 뉴욕의 시민들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된다. 뉴욕을 연고로 하고 있던 브루클린 다저스(브루클린은 뉴욕의 5개 자치구 중 하나다)와 뉴욕 자이언츠가 각각 서부의 LA와 샌프란시스코로 연고지를 이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당시는 메츠가 아직 생겨나기 전이었던 시절이었지만, 뉴욕을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 팀은 무려 3개나 있었다. 브루클린 다저스와 뉴욕 자이언츠는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뉴욕 양키스와 이들과 지역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던 팀이었다.

말이 라이벌이지 다저스와 자이언츠가 힘을 합쳐서 싸워도 이기기 어려웠던 팀이 당시의 양키스였다. 지금은 서부지구의 라이벌인 두 팀은 당시까지만 해도 동맹국과도 비슷한 협동 체제를 형성하며 양키스에 대항했지만, 요기 베라와 미키 맨틀, 화이티 포드 등이 버티고 있던 당시 양키스는 ‘왕조’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았던 무적의 팀이었다.

1947~56년까지의 10년 동안 양키스는 5년 연속(49~53)을 비롯해 7번의 월드시리즈를 재패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 기간 중에 브루클린 다저스는 1955년 월드시리즈에서 양키스를 꺾으며 사상 첫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으나, 나머지 5번의 대결에서는 모조리 패하며 무릎을 꿇어야 했다.(양키스와 다저스의 앙숙관계는 여기에서 기인한다) 자이언츠도 1954년 우승의 기쁨을 맛봤지만, 인기 몰이는 고사하고 적자를 면하기도 어려웠다.

당시는 메이저리그 팀들이 비행기를 타고 동부에서 서부까지 장거리 이동을 하며 경기를 하기에는 기술적인 면과 경제적인 면에서 문제가 있었기에 가장 서쪽에 있던 팀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였다. 서부는 야구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이에 월터 오말리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브루클린에 점점 중상층의 인구가 빠져나가며 구매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마당에, 이처럼 양키스에 눌려서는 큰 이익을 보기 힘들다고 판단한 그는 이미 미국을 대표하는 도시로 성장 하고 있었던 LA로 연고지를 이전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동맹 세력인 뉴욕 자이언츠의 빌리 스톤햄 구단주까지 끈질기게 설득해서 함께 이동하게 만들었다.

연고지 이전 계획이 보도된 후의 브루클린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16세 소녀부터 길거리의 청소부까지 연일 시청 앞에서 ‘오말리 규탄 대회’를 가지며 이전을 반대했다. 협박, 애원, 설득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저스를 브루클린에 남기기 위해 노력했으나 오말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결국 오말리는 브루클린 시민들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기고 LA로 떠나고 만다. 당시 뉴욕의 저명한 두 저널리스트였던 잭 뉴필드와 피트 햄밀이 지금까지의 역사적 인물들 중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던 인간 베스트 10’을 뽑아달라는 의뢰를 받았을 때, 1~3위로 꼽은 사람이 둘 다 똑같았다. 1위는 히틀러 2위는 스탈린, 그리고 3위는 월터 오말리였다.(두 명 모두 다저스의 열성적인 팬이었다.)


▷ 개척자 & 선구자

이미 브루클린 시절이던 1947년, 약간의 편법과 뛰어난 수완을 바탕으로 재키 로빈슨이라는 흑인 선수를 메이저리그에 선보인 오말리는 일각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선구자적인 구단주로 평가받고 있었다.

물론 그가 로빈슨을 메이저리그에 데뷔시킨 것은, 그가 특별히 인종 차별 반대주의자이거나 어떠한 숭고한 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돈’이 되기 때문이긴 했지만 말이다. 실제로 나중에 로빈슨이 노쇠한 기미를 보이자 오말리는 그를 트레이드 하려했고, 그것을 눈치 챈 로빈슨은 은퇴하고 말았다. 그것이 1956년의 일이었고, 로빈슨으로 인한 돈벌이마저 사라지자 더 이상 뉴욕에서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LA로의 진출을 시도한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업적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그가 로빈슨을 최초로 등용시켰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 할 것이며, 지금은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라 불릴 정도로 치열한 서부지역의 팀들이 메이저리그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오말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

그는 투자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1962년 개장한 다저스타디움은 공적 자금이 단 한 푼도 포함되지 않고 100% 오말리를 비롯한 투자자들의 사적 자금으로 완공된 구장이다. 이는 1920년대에 개장된 양키스타디움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남들보다 앞서갔던 오말리는 인프라 확충의 측면에서도 남들보다 항상 앞서있었던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1965년 완공된 사상 최초의 돔구장인 에스트로돔(휴스턴 에스트로스의 홈구장, 1965~1999년)은 오말리의 영향이 없었더라면 지어지지 못했을 것이라 한다.

새로운 팀과 새로운 구장이 갖추어진 캘리포니아에는 야구 열풍이 불어 닥쳤다. 다저스 경기는 연일 매진 사례가 이어졌고, 매년 흥행 돌풍을 이어갔다. 이전한지 2년만인 1959년 LA 다저스는 2번째 우승의 기쁨을 맛봤고, 다저스타디움이 개장한 후에도 63년과 65년 연거푸 우승하면서 전성시대를 열어갔다. 물론 구단주인 오말리의 주머니도 두둑해졌다.

뉴프런티어로의 도전은 대성공이었고, 오말리는 캘리포니아에 야구를 가져다 준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후로 야구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월터 오말리는 1970년 아들 피터에게 구단주 자리를 넘겨주었고, 9년 후 세상을 떠났다.

힘들었던 동부 시절을 뒤로한 채 서부를 개척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갔던 월터 오말리. 현지 시각으로 12월 3일에 있을 ‘베테랑 위원회’(명예의 전당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기자단 투표를 통과하거나 이 베테랑 위원회의 선임을 얻어야 한다)의 투표에서 그의 명예의 전당 입성 여부가 가려진다. 과연 그는 메이저리그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역사책에 기록될 수 있을까? 그 결과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