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SK 와이번스와 관련된 빈볼 시비 때문에 국내 프로야구가 상당히 소란스럽다. 국내 프로야구의 경우 투수의 실투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몸에 맞는 공은 작전의 일부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감독에게 많은 비난이 쏟아지고 있고, 팀내 기둥인 포수 박경완이 나머지 팀들의 집중 표적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데드볼’ 이라 부르는 ‘사(死)구’의 정확한 용어는‘Hit By Pitch(이하 줄여서 HBP)’다. 또한 ‘빈볼’의 ‘빈’을 ‘비어있는’이나 ‘무의미한’ 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는 팬들이 많은데, 사실 이 용어는 영어다. 콩을 가리키는 bean이라는 단어에는 ‘머리’ 라는 뜻도 있다. 즉 beanball이란 ‘머리를 향한 투구’ 라는 뜻이다.
메이져리그의 경우는 이러한 빈볼이 단순한 작전용이 아니라 투수의 무기로 사용되기도 한다. ‘타자의 몸 쪽으로 승부하지 못하는 투수는 위대한 투수가 될 수 없다’라는 것은 이미 야구의 정설. 메이져리그에서도 결국 타자의 몸 쪽으로 공을 뿌리지 못하는 선수는 뛰어난 투수로 남을 수 없다.(물론 컨트롤이 나빠서 그렇게 되는 경우는 예외다) 하지만 몸 쪽 공을 넘어서서 의도적으로 타자를 맞추기 위해 던지는 위협구나 빈볼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 위협구로 승부하던 투수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라 평가 받는 ‘Big Train' 월터 존슨(통산 417승 방어율 2.17)부터 시작해, 돈 드라스데일(209승 사이영상 1회), 밥 깁슨(251승 3117삼진 2.91), 놀란 라이언(324승 5714탈삼진) 등과 같은 전설의 강속구 투수들은 인사이드 승부를 즐기는 선수들이었다. 단순히 배터박스 가까이 공을 던지는 수준을 넘어서 타자의 몸을 향해 위협구를 던지는 것도 꺼리지 않는 투수들이었고, 그 결과 그들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은 최근 들어 더더욱 두드러진다. 로져 클레멘스를 필두로 해 랜디 존슨과 케빈 브라운 그리고 페드로 마르티네즈까지, 이들은 다른 투수들에 비해서 공 한 개의 크기만큼 더 가깝게 타자의 몸 쪽으로 공을 찌를 수 있는 투수들이다. 또한 그것을 자신들의 무기로 삼았으며, 상대 타자의 몸에 맞는 한이 있더라도 크게 괘념치 않았다.
배리 본즈에 비견될 만큼 까다로운 성격에 자존심도 매우 강한 클레멘스, 게임이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으면 덕 아웃에 돌아와 물통 을 걷어차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 불같은 성격의 브라운, 20세기 이후 출생자로 가장 많은 몸에 맞는 공을 던진 랜디 존슨(역대 3위), 한 때 다른 팀 타자들로부터 ‘그는 베터박스에 있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라는 말을 들었던 페드로.
물론 이들 모두가 최고의 강속구와 뛰어난 구위를 자랑하는 스터프를 가진 투수들이지만, 이 선수들을 역사에 남을만한 투수가 된 것은 인코스로 공을 던질 수 있는 ‘두둑한 배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매덕스와 함께 ‘5대 투수’ 라 평가 받던 이들은 방법은 달랐지만 하나같이 위협구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심장을 지닌 투수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위협구로 인해, 한 번 이상씩은 언론과 팬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고, 다른 팀 동료들에게 외면당한 기억도 있는 선수들이다. 특히 페드로와 클레멘스의 경우는 단순한 몸 쪽 승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차하면 상대의 머리를 향해 97마일의 강속구를 뿌려대는 유명한 ‘헤드 헌터’들이다. 타자들은 그들의 구위가 아니라 성격을 두려워했다.
클레멘스가 자신에게 특히 강한 피아자의 머리로 공을 던져서 맞춰버린 것도 모자라, 부러진 방망이까지 던진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다. 페드로 역시 잘 던지고 있다가도 그 날 경기에서 자신에게 2안타 이상 뽑은 선수가 타석에 올라오면 기분 나쁘다는 듯 타자의 머리를 향해 위협구를 던진다. 특히 1994년에는 23번의 선발 등판 중 절반이 넘는 12번을 퇴장 당했고, 그 중 3번은 난투극이 벌어졌다.
결국 이 둘이 맞붙은 2003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쉽 3차전에서는 빈볼 시비로 인해 경기장이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양키스 포수 호르헤 포사다의 머리를 향해 빈볼을 던질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제스쳐를 취한 페드로에게 분노한 양키스 코치 돈 짐머가 달려들었고, 페드로는 이 72세의 돈 짐머를 땅바닥에 패대기쳐 앰뷸런스로 실려 가게 만들었다.
▷ 몸에 맞는 공 그리고 팔꿈치 보호대
공의 반발력이 적어 타구가 멀리 날아가지 않던 1919년 까지를 우리는 흔히 ‘데드볼 시대’라고 부르고 그 이후를 ‘라이브볼 시대’라고 한다. 메이저리그 역대 단일시즌 몸에 맞는 공 순위를 보면 상위 120위(19개를 기록한 공동 97위가 무려 24명) 중 54회가 이 데드볼 시대의 기록이다.
이후 라이브볼 시대가 처음으로 열린 1920년 버키 해리스라는 선수가 21개의 몸에 맞는 공을 기록한 뒤 무려 32년간은 이순위에서 120위 안에 들어가는 선수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1920년 레이 채프먼(Ray Chapman)이라는 한 재능 있는 타자가 양키스의 잠수함 투수 칼 메이스(Carl Mays)의 강속구에 머리를 강타당한 뒤 사망했기 때문이다. 헬멧도 쓰지 않은 상황에서(헬멧 착용이 규정으로 정해진 것은 50년대의 일이다) 새로 도입된 반발력이 강한 공에 맞았을 경우 죽음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안 타자들은 몸에 맞는 공을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투수들 역시도 타자를 겨냥해 공을 던지는 것을 꺼려했다.
이후로도 19개 이상의 HBP 기록은 50년대와 60년대에 4번씩, 70년대에 6번 80년대에 5번이 나왔을 뿐이다. 그것도 론 헌트(6회)와 돈 베일러(5회) 같이 공에 겁먹지 않았던 특정 선수 몇몇이 여러 번 랭크되었을 뿐 선수 자체는 얼마 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와중에도 대범(?)하게 타자의 머리나 팔꿈치를 향해 위협구를 던질 수 있었던 투수들(위에서 언급한 드라스데일, 깁슨, 라이언 등)은 리그 최고의 투수로 군림할 수 있었고, 타자들은 그러한 그들의 빈볼 앞에서 목숨과 선수생명의 위기를 느끼며 피하는데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몸에 맞는 공은 90년대 후반에 들어 크게 증가한다. 1995년 이후 작년까지 12년 동안 무려 45번이나 HBP부문 역대 120위 안에 랭크될만한 기록들이 쏟아진 것이다. 이때부터 타자들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선수들의 장타력은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무려 75년 동안 21번 밖에 나오지 않았던 기록이 단 12년 사이에 두 배가 넘게 나타난 이유는 뭘까?
팔꿈치 보호대의 등장은 현대 야구에 있어 또 하나의 큰 획을 그은 사건이다. 정확히 언제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배리 본즈가 착용하면서부터 본격적인 논란이 일기 시작했고, 메이저리그 사무국 측에서도 이를 제재하려 했으나,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선수노조의 주장에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야구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다는 논란이 많았지만, 당대 최고의 헤드 헌터들이 그 기세를 떨치고 있던 시기라 규제할 수 있는 근거가 희박한 실정이었다. 이후 팔꿈치 보호대는 급속도로 퍼져나갔고, 이제는 안타를 치고 나간 후 팔꿈치와 정강이의 보호대를 풀어 주루 코치에게 건내는 장면은 경기의 일부분이 되고 말았다.
▷ 타고투저의 시대
결국 이는 투수들의 목을 죄는 결과로 나타난다. 9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 불어 닥친 타고 투저의 열풍은 이러한 팔꿈치 보호대와 무관하지 않다. 홈 플레이트 쪽으로 바싹 붙어서 투수를 정면으로 노려보는 타자들에게서는 더 이상 몸에 맞는 공에 대한 두려움 따위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아직까지 빈볼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타자들은 이전에 비해 훨씬 더 공격적으로 타격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는 많은 장타와 몸에 맞는 공으로 나타났고, 60년대부터 80년대 까지 투수의 시대를 열었던 메이저리그는 이제 타자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보호대는 단순히 ‘보호’의 기능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선수들이 보호대를 이용해서 인코스로 찔러 오는 공에 팔꿈치를 살짝 들이대며 1루로 진루했다. 이 뿐만 아니라 선수의 몸에 맞게 제작된 보호대는 팔꿈치를 적당히 조여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타자의 타격 폼이 쉽사리 무너지지 않게 만들어 준다. 쉽게 말해 결과적으로는 팔꿈치 보호대의 사용은 코르크 방망이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불러오는 것이다.
이 후 투타 양쪽 모두 많은 발전이 있었고, 투수들 역시도 타자를 공략하는 새로운 패턴을 익히며 위력적인 투구를 하는 선수들이 나타났지만, 아직까지도 여전히 타자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는 위협구로 타자들을 윽박지르던 몇몇 투수들이 자초한 결과인 것이다.
초창기 야구는 방망이와 글러브, 그리고 모자 하나만 쓰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스포츠였다. 특수 포지션인 포수에 대한 보호 장비 착용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현대로 오면 올수록 각종 다른 보호구나 장비들이 계속해서 새로이 나타나고 있다. 50년 후에는 만화책에서나 봤던 것처럼 몸 전체에 갑옷과 같은 보호구를 두르고 경기장에 나서야 하는 것은 아닐까?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같은 동료인 타자들의 머리를 향해 위협구를 뿌리는 투수들, 그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또한 마찬가지로 더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각종 보호대를 착용하는 타자들. 양쪽 모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알지만 마음속 한편으로 씁쓸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몸 쪽 승부를 즐기는 배짱 있는 투구를 하지만, 완벽한 컨트롤을 자랑하며 90년대 최고의 마구였던 90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을 상대의 머리가 아니라 주저 없이 스트라익 존 한가운데로 찔러 넣어 수많은 스탠딩 삼진을 잡았던 매덕스, “나는 다른 선수들이 왜 장갑이나 팔꿈치 보호대를 착용 하는지 모르겠다”며 여전히 맨 몸으로 타석에 올라와 최고의 타격을 보여주는 블라드미르 게레로.
클레멘스와 페드로가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될 뿐 매덕스만큼 동료 선수들에게 존경받지 못하고, 사람들이 본즈의 귀신같은 타격을 보고 감탄하면서도 게레로가 타격하는 모습에 더 큰 매력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보호대 따위는 알지 못했던 수많은 올드팬들과, 좀 더 순수한 힘 대 힘의 대결을 원하는 야구팬들이 이들에게 열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