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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의 꽃 보다 야구

빙그레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선봉장', 이강돈을 만나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4. 2.

대전의 야구팬들이라면 1980년대 후반에서부터 1990년대 초반, 빙그레 이글스(한화 이글스 전신)를 수놓던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기억할 것이다. 이정훈을 필두로 강정길, 장종훈, 강석천 등 정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3할 타율과 두자릿수 홈런은 기본(?)이었다는 선수들이 빙그레 타선을 수놓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이렇게 대전구장을 수놓은 ‘공포의 타선’은 지금의 김태균, 김태완, 이범호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당시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핵심멤버는 클린업 트리오가 아니었다. 선두 타자와 중심 타선을 연결하는 2번 타순에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언제나 이강돈(48)이라는 뛰어난 왼손 타자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아니 왜 이강돈이라는 걸출한 타자를 2번에 배치하느냐? 마땅히 중심타선으로 옮기는 것이 맞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덕 당시 감독은 그를 꾸준히 2번으로 기용했다. 그리고 호타 준족인 그답게 프로 통산 두 번째 사이클을 기록하며 팀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빙그레 이글스에서 한화 이글스로 팀명이 바뀌는 중에도 그는 늘 팀에 있었다. 은퇴 이후에도 한동안 대전을 떠나지 않으며 코치로서 좋은 모습을 보였던 그는 어느날 갑자기 프로무대에서 돌연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고교선수들의 패기가 가득찬 황금사자기 전국 고교야구 선수권 대회에서였다. 고등학교 감독으로서 팀을 전국대회 4강으로 이끈 이강돈 감독은 이미 ‘아마야구 명장’이 되어 있었다. 아직까지도 빙그레 시절의 패기를 품에 안고 사는 그를 목동구장 덕아웃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Q : 황금사자기 고교야구 선수권 대회가 한창임에도 불구하고 바쁘신 시간 내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먼저 ‘최고의 2번 타자’ 이강돈 선수를 기억하는 팬 여러분들게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이강돈 감독(이하 ‘이’로 표기) : 제가 1997년에 은퇴했으니, 일선에서 물러난지 벌써 12년이나 지났습니다. 그라운드를 떠난 이후 한화 이글스, 롯데 자이언츠 코치생활을 거쳐 현재까지 고교야구 감독을 3년째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프로나 아마를 떠나 야구는 자기하기 나름인 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청주고등학교 감독을 맡고 있는 만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과 훌륭한 후배들/제자들을 육성하고 있음을 팬 여러분들께서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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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사자기 고교야구 선수권 열기로 가득한 목동구장. 이곳에 ‘왕년의 빙그레 2번타자’, 이강돈이 있다.

무서울 것이 없었던 현역시절

Q : 1990년대 초반, 빙그레 이글스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선봉장이셨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정말 무서울 것이 없으셨을 것 같습니다.

이 : (웃음) 맞습니다. 정말로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남부럽지 않았지요. 당시 이정훈, 강정길, 유승안 등등 타자들 이름만으로 보더라도 그야말로 ‘최강타선’ 아니었겠습니까? 이렇게 훌륭한 동료들과 함께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사람들이 ‘왜 잘 치는 이강돈이를 2번에 배치하느냐’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김영덕 감독님 생각은 조금 다르셨습니다. 원래 1번 타자가 출루하면 2번 타자는 1점 선취를 위해 번트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습니까? 아웃카운트 하나를 희생시키더라도 주자를 2루에 보내는 것이 전형적인 2번타자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팀에서는 2번 타자를 ‘가장 잘 치는 타자’로 배치했습니다. ‘왜 아웃카운트 하나를 희생시킬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지요. 따라서 제가 잘 치기만 하면, 히트 앤드 런 작전 구사가 얼마든지 가능했습니다. 이 작전이 잘 먹혀들기만 하면 1사 2루 상황이 아닌 무사 1, 2루나 무사 1, 3루 상황을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김영덕 감독님의 계산이 잘 맞아떨어졌기에 제가 2번 타자로도 성공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Q : 그런 ‘뒷이야기’가 있었군요. 그렇다면 스스로 판단하기에 당시 본인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 (당연하다는 듯이) 부상이 없었습니다. 건강했기 때문에 꾸준히 출장할 수 있었고, 전 경기 출장 기록도 두 번이나 세울 수 있었습니다. 역시 건강해야 지신의 기량이 마음껏 나오는 것 같습니다.

Q :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역시절에는 단 한 번도 한국시리즈 우승의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 : 현역에 몸담으면서 준우승만 네 번 했습니다. 그 중 세 번은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 전신)에게 우승을 내주었고, 한 번은 롯데 자이언츠에게 우승을 내주었지요. 그런데 당시에는 마땅한 투수가 없었습니다. 한희민, 이상군 투수 정도가 선발마운드에 있었을 뿐이었지요. 반면 상대팀은 선동렬, 김정수, 문희수 등 1류 투수들이 많아 경쟁이 되지 못했습니다. 타선이 점수를 많이 뽑는다 해도 마운드에서 잃은 점수를 다시 내어주다 보니 도저히 이길 도리가 없었습니다. 송진우 등 몇몇 투수들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그다지 큰 각광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Q : 이강돈 선수를 떠올릴 때 회자가 되는 것 중 하나가 1993년 올스타전 MVP를 알리는 홈런이었습니다. 그때 상대투수도 결코 만만치 않은 ‘김경원(현 경찰청 투수코치)’이라는 신예였죠. 이 경기 빼고 현역 시절에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요?

이 : (김)경원이에게 뽑아 낸 홈런으로 올스타전 MVP가 된 기억도 기억이지만, 솔직히 페넌트레이스 때에는 극적인 상황을 거의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제가 사이클을 기록했던 1987년 8월 27일, OB 베어스(두산 베어스 전신)와의 잠실 원정경기가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아마 프로 통산 두 번째 사이클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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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아마야구 명장’으로 거듭난 이강돈 감독. 그는 자신의 현역 시절 이야기와 제자들을 가르치는 지도철학에 대해 가감없이 이야기했다.

고교야구 명장, 이강돈

Q : 프로야구 코치 역임 이후 KBO 육성위원을 거쳐 청주고 감독으로 부임하셨습니다. 고교야구 지도자가 된 계기가 있으시다면요?

이 : 청주고 야구부 전신이 청주 기계 공업고등학교라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그 청주기계공고 감독을 하던 제 친구 강정길이 경북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적을 옮기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KBO 육성위원이었던 제가 친구의 후임으로 청주 기계 공고 야구부 감독을 맡게 됐습니다. 지금은 제자들을 가르치며 고교야구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프로로 복귀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물론 지금 일에 큰 만족을 느끼고 있는 것은 두말 할 나위 없다는 점은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Q : 그렇다면 제자들을 가르칠 때 무엇을 중점적으로 가르치십니까?

이 : (역시 단호하게) 정신력을 가장 강조합니다. 어제도 선수들 앞에서 이야기를 했지만, 솔직히 고교생들의 기량은 프로에 비하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보완해야 할 점이 많지요. 그러나 이를 커버할 수 있는 것은 정신력이라 생각합니다. 정신력이 바탕이 된다면 실패할 일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Q : 4월 1일 현재, 팀을 황금사자기 전국대회 4강으로 올려놓으셨습니다. 이는 분명 대단한 성과라 생각합니다. 결승을 코앞에 둔 현 상황에서 수장으로서의 각오를 들려주십시오.

이 : 결승전 상대인 천안 북일고등학교와 비교해 보았을 때 솔직히 6:4 정도로 저희가 전력이 미치지 못합니다. 이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전력이 뒤진다고 해서 무턱대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전력 차이는 인정하되,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저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Q :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후배 선수들에게 간단하게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이 : 어느 분야에서든 마찬가지겠지만, 하찮은 돌이라도 갈고 닦으면 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야구든 무엇이든지 간에 ‘노력하는 사람 못 이긴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이나 현역 프로야구 선수들 모두 끊임없이 노력하는 선수가 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무서울 것이 없어요(웃음).

※ 이강돈은 누구?

1961년 2월 27일 출신으로 대구상고-건국대를 거쳐 빙그레 이글스(한화 이글스)에 입단한 교타자 출신 아마야구 지도자다. ‘호타준족’의 대가답게 현역시절 12년 동안 통산타율 0.287, 1132안타, 556타점을 기록했던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선봉장이었다.

1986~1995년까지 10년 연속으로 100경기 이상 출장했던 그는 역대 2번 타자 최다 타점(1990년 84타점)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며, 1987년에는 프로통산 두 번째로 사이클을 기록할 만큼 다재다능함을 선보이기도 했다.

2006년부터 고교야구 감독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2009년 4월 1일 현재 소속팀 청주고등학교를 황금사자기 4강으로 이끄는 등 뛰어난 지도력을 과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