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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져의 야구 칼럼/프로야구 이야기

사인훔치기 논란, 김성근 감독이 욕 먹을 이유 없다!

by 카이져 김홍석 2009. 10. 19.

딱 깨놓고 말씀드리죠. 전 SK 와이번스를 싫어합니다. 아니 김성근 감독을 싫어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김성근 감독의 야구관과 그분이 지향하는 플레이 스타일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SK가 우승을 했던 지난 2년 동안의 결과가 그다지 맘에 들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분의 지도력과 SK의 강함을 인정하지 않거나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올해를 포함해 지난 3년 동안의 SK는 80~90년대를 주름잡았던 해태 왕조와 더불어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강한 두 팀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들이 그러한 강함을 손에 넣은 것은 김성근 감독의 능력이 가장 큰 역할을 했습니다.

과거로부터 몇몇 안 좋은 사건들이 겹치고, 그 결과 김성근 감독과 SK에 대한 안티 여론이 형성되면서 지금의 김성근 감독은 무슨 말만 하면 나머지 7개 구단의 야구팬들로부터 뭇매를 맞는 처지가 되고 말았죠. 그러나 그분의 말이 전부 나쁜 의견이거나,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발언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인연(학연, 지연 등)으로 말 한 마디 쉽게 내뱉기 힘든 한국 프로야구의 풍토 속에서 그나마 소신 있는 발언을 해주는 몇 안 되는 야구계의 원로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아무리 수많은 사람들이 김성근 감독을 싫어한다고 해도, 진리가 거짓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살인범이 “1더하기 1은 2다”라고 말하면, 그 순간부터 1더하기 1이 3이나 4로 바뀌나요? 절대 그렇지 않죠.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진리를 말한 이상, 그것은 옳다고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아무리 7개 구단의 야구팬들이 김성근 감독을 싫어한다고 해도, 그분이 한 말이 진리인지 아닌지 정도는 구분을 한 후에 비판을 하고 비난을 해도 늦지 않다는 뜻입니다.

헌데, 가만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나도 많죠. 자신이 싫어한다고 해서 그분의 모든 말을 매도하고 어떻게든지 꼬투리를 잡아서 비난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야구팬 네티즌들을 보고 있으면 씁쓸한 생각이 들 뿐입니다. ‘싫고 좋고’의 문제를 떠나서 ‘옳고 그름’을 먼저 따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 마치 김성근 감독과 SK의 야구를 무턱대고 부정하는 것만이 ‘진정한 야구팬이 되는 유일한 방법’인냥, 이유도 없이 비난부터 쏟아내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군상들의 댓글을 보고 있으면 구역질이 날 뿐입니다.

이번 ‘SK의 사인 훔치기 논란’에 관련된 반응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난독증’임을 증명하는 듯한 댓글들이 너무나도 많더군요. 대체 뭐가 문제인지 하나씩 살펴볼까 합니다.

[스포츠조선]KIA 선수들, SK 사인훔치기 의혹 제기

이번 사건의 시발점이 된 기사입니다. 기사를 한 번 읽어보시지요.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이 뭐죠? 두산 선수 중 한명이 KIA 선수에게 “SK가 사인을 훔치더라”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KIA 선수는 기자에게 “두산 선수가 SK가 사인을 훔쳤다는 말을 나에게 하더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기자는 “두산 선수가 KIA 선수에게 SK가 사인을 훔쳤다는 말을 했다고 말하더라”는 기사를 썼습니다.

카더라 통신이 두 다리를 건너서 알려지게 된 내용의 기사. 과연 얼마나 신뢰해야 할까요? 이 기사 속에 드러난 ‘사실’은 ‘두산의 어떤 선수가 KIA의 어떤 선수에게 사인 훔치기에 관한 내용을 말했다’는 것뿐이죠. 그 외의 ‘진리’라고 할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SK가 사인을 훔쳤다는 증거는 정황상의 증거조차도 없는 실정입니다.

그 어떠한 조사나 분석도 이 기사 속에는 없습니다. 단지 카더라 통신만 전하고 있을 뿐이죠. 평소에는 ‘조-중-동’이라고 싸잡아 비난하면서 그곳의 기사는 절대로 믿지 않을 것처럼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김성근 감독을 비난할 수 있는 건수가 생기자 그 기사가 100% 진리인양 받아들이는 모습이 참 재미있더군요. 그런 기사를 보고 비난부터 쏟아내고 있는 자신이 부끄럽다고 생각해보신적 없으신가요?

자, 그럼 이번에는 아래의 기사도 한 번 보시죠.

[일간스포츠] 사인 훔치기 의혹 김성근 감독 “당하지 않는 게 프로다”

김성근 감독이 사인 훔치기 논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힌 내용의 기사입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 기사를 읽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결국 사인 훔치기를 인정했구만”이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난독증인가요? 대체 김성근 감독이 언제 사인 훔치기를 인정했죠?

마치, 살인 용의자가 “칼은 위험한 물건이니 간수를 잘해야 한다”라고 말하자, 옆에 있는 황현희 경찰이 “거 봐~ 결국 살인 혐의를 인정했구만!”이라고 말하는 모습과 너무나도 똑같네요. 왜 개그콘서트를 보는 듯한 기분을 기사의 댓글을 보면서 똑같이 느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김성근 감독이 “우리는 사인을 훔치지 않았다”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 나름의 스타일입니다. 젊은 기자들이 취조하듯이 던지는 질문 앞에다 대고, 훨씬 어른인 감독이 변명하는 뉘앙스로 “그런 적 없다”라고 말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나요? 김성근 감독은 약간의 우회로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상대방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화법을 주로 사용하는 사람이죠. 이번에도 마찬가집니다. 기사 내용을 한 번만 정독해 봐도, 김성근 감독이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런 적 없다”라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 않나요? 기사에도 분명히 '사인을 훔친 게 아니라 자료를 꼼꼼히 수집하고 면밀히 분석한 결과임을 강조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또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사인 훔치기에 당하지 않는 것이 프로다”라는 말인데요. 개인적으로는 이 말이 대체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너무나도 당연한 말 아닌가요? 사인 훔치기는 명백한 반칙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하는 것은 프로답지 못한 행위입니다. 전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김성근 감독의 의견에 100% 공감합니다.

벤치에서 그라운드에 나가 있는 선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할 때, 코치는 엄청나게 많은 동작을 한꺼번에 취하죠. 적어도 5~6개는 넘는 동작을 한꺼번에 합니다.(TV 중계때 자주 보셨죠?) 그 중 진짜 사인이 몇 번째인지는 소속 팀의 선수들만이 알고 있죠. 매 경기 혹은 이닝이 시작될 때마다 ‘이번에는 4번째가 진짜 사인이다’라는 등의 지시가 선수단에 내려지고, 선수들은 그에 맞춰 진짜 작전을 판별하고 실행하게 됩니다.

자, 왜 이러한 방식을 취할까요? 바로 상대 팀의 사인 훔치기를 막기 위함입니다. 상대방이 사인 훔치기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100% 확신이 있다면 애당초 필요가 없는 행동이죠. 그런데 매일 그라운드 위에서는 이러한 것이 상식처럼 행해집니다. 만에 하나라도 있을 사인 훔치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죠. 프로답게 미리미리 대처를 하는 겁니다. 문제는 어느 팀이 더욱 철저하고 완벽하게 대비하는 것이냐에 달렸죠.

김성근 감독은 바로 그러한 점을 이야기했던 겁니다. 바로 이러한 대비를 철저히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프로답지 못한 것’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너무나도 상식적이고 당연한 내용이지요.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프로라면 스스로 몸에 배어있어야 할 태도입니다.

결국 김성근 감독은 “우리는 사인 훔치기를 하지 않았다. 만약, 두산이 사인을 훔치기 당해서 졌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프로의식이 모자라서이다”라고 일침을 가하는 취지의 발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도 너무나 공감합니다.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정식으로 문제를 삼아 항의를 해야지, 이런 식으로 그 내용이 유출되어 기사화 된다는 것은 문제가 있지요. 게다가 애당초 프로라면 사인을 들키지 않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김성근 감독의 장점은 적어도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과 그에 대한 행동 방식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데 있다고 봅니다. 10점차 상황에서도 도루를 하고, 더 많은 점수 차를 벌이기 위해 다소 무리하다 싶을 정도의 홈 쇄도를 하는 것이 SK의 야구죠. 10점차 상황이라며 지고 있는 팀도 방심해서 상대방의 도루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지만 SK는 변함이 없죠. 자신들이 10점차로 이기고 있을 때는 도루를 하기 위해 힘쓰고, 자신들이 10점차로 지고 있을 때도 상대방에게 도루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10점 차 상황에 도루를 시도하는 야구를 하기 때문에 전 SK와 김성근 감독을 싫어합니다. 저의 야구관과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죠.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표리부동’하지는 않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사인 훔치기를 당하지 않는 것이 프로다”라는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김성근 감독과 SK 선수들은 그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것이 위의 기사 속에 나타나 있죠. 한편으로는 굉장하다 싶을 정도의 프로정신 아닌가요?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김성근 감독 스타일의 야구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적어도 한국 야구가 지향해야 할 바는 ‘이기는 것에 목숨 거는 야구’보다는 ‘역전의 빌미를 남겨주더라도 팬들이 즐거워할 수 있는 야구’에 있다고 전 확신합니다. 메이저리그가 그러하듯이 말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성근 감독에게 무조건적인 비난의 일침을 날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좋고 싫음’보다는 ‘옳고 그름’이 중요하니까요. 이유 없는 비난은 야구계 전체를 멍들게 할 뿐입니다. 비난은 모든 의혹이 '사실이었다'고 밝혀진 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안 봐도 뻔하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당장 역 앞에 가셔서 돗자리 펴시기 바랍니다.

// 카이져 김홍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