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효조, 김민호, 박정태, 김응국, 전준호, 이종운, 공필성, 강성우, 박계원, 조성옥, 김민재... 그리고 윤학길, 박동희, 염종석, 윤형배...
오랜 시간 동안 롯데 자이언츠를 응원해온 팬 분들이라면 위에 나열된 이름이 어떤 기준으로 선별된 것인지를 바로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바로 1992년 롯데 자이언츠의 두 번째 우승을 이끌었던 주역들이니까요.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부산의 수백만 팬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바로 그 영웅들이죠. 당시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오르곤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박수를 치시며 기뻐하시던 아버지의 얼굴도 생생하게 기억이 날 정도니까요. 저 당시 롯데의 우승을 지켜보면서 저는 ‘야구를 좋아하는 어린아이’에서 조금 더 성장해 ‘진짜 야구팬’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후 무려 17년이란 세월 동안 롯데는 ‘V-3’의 꿈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18년째인 내년을 기대해봐야 하죠. 그렇기 때문에 롯데 팬들은 저 당시 선수들을 더욱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95년과 99년의 준우승을 이끌었던 선수들과 함께 말이죠.
저 영웅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이틀 전 롯데 구단으로부터 코칭 스태프 개편을 완료했다는 보도자료를 받았습니다. 반가운 이름들이 가득하더군요. 2군 감독이 된 박정태를 비롯해 공필성은 1군 수비코치, 박계원은 1군 주루코치의 보직을 받았습니다. 2군 투수코치로는 윤형배, 작년에 은퇴하고 일본 연수를 다녀온 염종석은 2군 재활코치로 임명되었습니다.
다른 구단에서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영웅들도 있습니다. ‘안타제조기’ 장효조는 삼성 2군 감독, ‘고독한 에이스’ 윤학길은 LG 1군 투수코치로 있지요. 올해까지 삼성 배터리 코치로 있던 강성우는 한대화 감독을 따라 한화의 배터리 코치로 보직을 옮겼습니다. 한화의 김민재도 올해 은퇴와 더불어 코치직을 약속 받아놓은 상태죠.
고향인 부산의 아마야구 지도자로 ‘차세대 롯데맨’을 키우고 있는 영웅들도 있는데요. 김민호와 김응국은 현재 모교인 부산고등학교의 감독과 코치로 호흡을 맞추고 있습니다. 부산고와 더불어 부산의 고교 야구 양대 산맥인 경남고등학교에는 이종운이 감독을 맡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2007년 3월 박동희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며 ‘제2의 선동열’을 기대하며 자신을 응원해주었던 팬들의 가슴에 큰 아픔을 남기고 말았지요. 올해 7월에는 부산고 감독시절 추신수와 백차승, 정근우 등을 키워냈던 조성옥 동의대 감독이 지병인 암을 이기지 못하고 영면에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92년 우승의 주역들 가운데 대부분은 지도자로 제2의 야구인생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그만큼 당시 롯데에 좋은 선수들이 많았다는 반증이겠지요.
그런데... 전준호가... 전준호가... 전준호가...
롯데의 코칭스태프 완편에 대한 보도자료를 받은 후 또 하나의 보도자료를 받았습니다. 선수협으로부터 날아온 것이었는데요, 그 내용에는 ‘무적 선수’인 전준호의 은퇴 소식이 담겨있었습니다. 제목을 본 순간부터 울컥하는 기분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더군요. 롯데 자이언츠의 1번 타자로 92년의 우승과 95년 준우승의 주역, 현대로 이적한 이후에도 ‘유니콘스 왕조’의 돌격대장으로 활약하며 4번의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웠죠. 이처럼 전준호는 이종범이나 이대진(4번)보다도 많은 5번의 우승 경험(현역 최다)을 자랑하는 프로야구의 레전드입니다.
양준혁과 더불어 2000경기 출장과 2000안타를 동시에 달성한 단 두 명의 선수 중 한 명이며, 역대 1위인 550도루의 기록을 남긴 ‘기록의 사나이’입니다. 출장경기수(2091)-득점(1171)-최다안타(2018) 부문에서 역대 2위의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 프로야구에서 유일하게 100개의 3루타를 기록한 주인공입니다.(3루타 2위는 61개의 김응국)
그렇게 많은 경기를 뛰었음에도 그가 기록한 병살타는 고작 54개! 통산 타율과 출루율도 .291와 .375로 매우 훌륭합니다. 19년이라는 경력과 출장경기수를 감안하면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올 정도로 대단한 기록이지요.
헌데 그런 선수가 올 시즌 종료와 더불어 방출 통보를 받더니, 무적 선수의 신분으로 선수협을 통해 은퇴 소식을 전하는군요.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그 누구보다도 화려한 은퇴경기를 열어서 수많은 팬들의 축복 속에 그라운드와의 작별을 고해야 마땅한 선수가...
은퇴 소식 자체가 아쉬움으로 남아 많은 팬들의 눈물을 뿌리게 만드는 그러한 선수가...
고작 이런 모양새로 팬들 곁을 떠나게 되다니요...
전준호가 속한 팀이었기에 현대의 우승에 박수를 쳐줄 수 있었습니다. 전준호였기에 다른 유니폼을 입고 우승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그의 모습에 함께 웃어줄 수 있었습니다. 전준호였기에 그가 롯데가 아닌 다른 팀의 레전드가 되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해줄 수 있었습니다. 전준호였기에... 전준호였기에... 전준호였기에 그 모든 것들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전준호를 이런 꼴로 물러나게 만드는군요. 정민태에게 했던 짓을 그대로 답습한 히어로즈의 작태를 보고 있노라면 욕이 절로 나옵니다. 어떻게 2년 전에 자신들이 했던 실수를 그대로 반복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정민태의 ‘허울 좋은 은퇴식’을 보면서 혀를 찼던 기억이 생생한데, 전준호는 그보다 더 못한 신세가 되고 말았네요.
물론 전준호가 이대로 야구계를 등질 일은 없을 겁니다. 김성근 감독의 뜻도 있고 하니, SK가 되건, 아니면 다른 팀이 되건 지도자로서의 길이 열리겠지요.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식의 은퇴는 정말 가슴이 아프네요. 그가 롯데라는 팀을 떠난 지 무려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는 롯데 팬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전설의 1번 타자’이기 때문입니다.
롯데의 코칭스태프 개편이 조금만 더 늦게 이루어졌더라면 전준호가 롯데로 돌아오는 것이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상상’을 하면서 더욱 커진 아쉬움을 애써 삼킵니다. 마산고와 영남대를 나온 경남 출신의 전준호가 롯데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는 것은 롯데 팬들의 본능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92년 당시 신인으로 고작 30이닝을 던졌던 가득염을 제외하면, 전준호를 마지막으로 당시 우승의 주역들이 모두 무대 위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도록 팬들의 사랑을 받아온 ‘레전드’의 마지막이 이런 식이라니, 참으로 서글프기 그지없네요.
전준호 선수... 우리는 기억하겠습니다. 뿌리도 없고 역사도 없는 히어로즈 구단은 당신을 잊을 지라도, 당신으로 인해 기뻐했던 순간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들은 영원히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지금은 정처 없는 떠돌이가 되어버린 현대 유니콘스의 유민들도 당신을 기억하고 기릴 것입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또 한 번 최고가 되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늘 응원하며 지켜보겠습니다. 당신께서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지금 우리들이 느끼는 서글픔을 깨끗이 지워주시리라 믿습니다. 그 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 ‘20년 롯데팬’ 카이져 김홍석[사진=롯데 자이언츠, 히어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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