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했던 16연패의 사슬을 끊고, 3주 만의 첫 승을 거둔 날, KIA 선수단은 비로소 웃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크게 웃지는 못했지요. 연패 기간 동안 받아왔던 설움에 복받친 탓인지, 선수들의 얼굴 표정에는 웃음기와 울음기가 동시에 섞여있는 듯 했습니다.
오랜만에 승리 감독의 자격으로 인터뷰를 하는 조범현 감독의 목소리는 다소 격앙되어 있었습니다. 그 동안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개인 통산 2,000안타를 기록한 이종범의 목소리도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화면을 보지 않고 소리만 들었다면, 그가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만큼 KIA의 모든 관계자들에게 있어 이번의 1승은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팀이 연패를 거듭하는 동안 그것을 직접 경험하는 감독과 선수들의 심정을 누가 알까요? 특히 한국 프로 스포츠의 특성상 연패의 가장 큰 원흉은 항상 감독이 되기 마련입니다. 연승의 주인공은 선수가 되기 마련이지만, 언제나 연패의 주범은 감독이 첫 손으로 꼽히지요. 연승 중이라고 감독을 칭찬할라 치면 팬들은 “무슨, 선수들이 잘해줘서 그런거지~”라고 말합니다. 반면 연패가 거듭되면 “저 놈의 감독부터 바꿔라!”는 말부터 튀어 나옵니다.
감독이 ‘매니저’가 아닌 ‘사령탑’으로서의 지위를 가진 한국 스포츠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령탑이란 이미지는 다소 권위적이죠. 오랜 독재에 시달린 대다수의 우리나라 국민은 ‘권위’라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는 편이고, 그래서인지 많은 팬들이 감독이란 존재를 가까우면서도 먼 존재로 느끼는 것 같더군요. 선수와 감독이 의견 충돌 등으로 대립할 때, 대부분의 팬들이 일단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선수들의 편에 서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강자의 이미지를 가진 감독은 사실 매번 완벽하지 않으면 비난의 대상이 되기 일쑤입니다. 권위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기에 더욱 그렇지요. 팀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패배를 했을 때는 그 비난의 첫 번째 표적이 되고 맙니다. 이번의 조범현 감독의 경우도 그랬지요.
물론 KIA가 16연패를 하는 과정에서 조범현 감독의 실수가 없었다고 할 순 업을 겁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투수교체 타이밍이나 교체 선수, 타격감이 나쁜 김원섭을 계속 3번 타자로 기용하는 것 등은 감독의 고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손바닥도 맞춰야 소리가 나듯 그 모든 원인을 감독의 탓으로 돌릴 순 없지 않겠습니까?
야구는 경기 내적으로 투수들과 야수들의 끊임없는 호흡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투수를 돕는 건 타자고, 타자를 돕는 건 투수다.”라는 것이 제 나름대로의 야구 철학이지요. 투수는 타자들이 뽑아준 점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타자들 역시 투수를 돕기 위해 필요한 점수를 뽑는 등, 그 과정에서의 서로 간의 호흡이 아주 중요한 스포츠가 바로 야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좀 더 넓게 봤을 때, ‘선수와 감독 간의 호흡’으로 볼 수 도 있겠지요. 감독의 작전을 빛나게 만드는 것은 그 역할을 맡은 선수가 작전을 훌륭하게 성공시켰을 때입니다. 마찬가지로 선수를 빛나게 만드는 것은 그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필요에 따라 잘 써먹는 감독이 있을 때지요. 조범현 감독의 투수기용이 이해하지 못할 측면도 분명 있었지만, 대신 기용된 선수들이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만 보여주었더라면 ‘의표를 찌르는 작전’이 될 수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KIA의 연패는 감독과 선수들의 호흡이 예전같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요. 그 모든 책임을 감독에게, 그것도 시즌 중에 묻는다는 건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성적이 나쁜 구단이 감독을 시즌 중에 교체하는 건 특별히 그들이 큰 죄를 지어서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순히 팬들의 반발이 워낙 심하다 보니 일단 그 불을 끄는 것이 더 급하다고 봤기 때문이죠. 구단의 입장에서는 감독을 교체함으로써 “우리는 할 만큼 했다”는 뜻을 전달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1994년 월드컵이었던가요? 자책골을 넣은 콜롬비아의 한 선수가 귀국한 후 한 팬(이라 쓰고 ‘쓰레기’라 읽는다)이 쏜 총에 맞아 유명을 달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로 월드컵에서 자책골이 나올 때마다 ‘설마 저 선수도 살해당하진 않겠지?’라는 일말의 불안함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건 야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서 야구는 이미 국민적 생활스포츠로 자리잡았습니다. 가장 폭넓은 팬 층을 가지고 가장 오랫동안 사랑 받아온 스포츠이지요. 그래서인지 그만큼 자신의 지역을 대표하는 팀에 대한 애정이 더 지극한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폭력’으로 변질되어서는 곤란하겠지요.
KIA의 연패가 두 자릿수를 넘어가자 일부 광분한 팬(?)들은 구단의 버스를 막고 시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감독과 코칭스태프를 향해 욕을 쏟아내는 것은 물론, 자기들은 욕을 하면서 코치가 맞대응하자 그건 용서할 수 없다며 더욱 흥분하더군요. 16연패를 한 날에는 조범현 감독의 자가용을 가로 막았고, 결국 조범현 감독을 차에서 끌어 내려 강제로 사과를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다행히 지금이 80년대가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구단 버스가 불타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잠실구장에서 드러난 일부 극성스런 팬들의 행동은 모든 야구팬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자신들이 무슨 4.19 항쟁의 주역이라도 되는 냥 착각이라도 했던 것일까요? 자기들보다 나이도 많은 어른을 향해 욕을 퍼붓는 스스로의 모습이 얼마나 추한지를 깨닫지는 못하나 보더군요. 자기들만이 진정 KIA를 위하는 팬인냥 입에 담지도 못할 단어를 쏟아내는 군상들의 모습은 역겹기만 했습니다.
물론 더 많은 KIA팬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계속해서 응원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9일 경기에서 팀이 16연패에 빠져 있는 상황 속에서도 경기장을 찾아 목이 터져라 응원하던 사람들이 있었죠. 경기 초반 팀이 0-2로 끌려가는데도 그 목소리는 전혀 줄지가 않았습니다. 결국 KIA는 연패를 끊어냈고,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만큼이나 무등구장을 찾은 팬들의 감격도 컸을 겁니다.
연패 중인 감독의 심경, 그리고 그 연패를 끊은 감독의 심정을 과연 그 누가 다 이해할 수 있을까요? ‘조뱀’이란 달갑지 않은 별명으로 불리다가, 지난해 후반기에 엄청난 반전을 보이며 우승을 차지하자 ‘조갈량’이 되고, 올해 다시금 ‘조뱀’으로 전락한 조범현 감독. 과연 변한 것이 감독일까요, 아니면 팬들의 마음일까요.
메이저리그의 시카고 컵스는 1908년 이후 올해까지 무려 102년째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팀은 지금도 여전히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인기 있고 사랑 받는 팀 가운데 하나로 다른 많은 팀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지요. 원래 원정 팀의 홈런 볼을 다시 그라운드로 던져주는 것은 리글리필드를 찾은 컵스팬들만의 자부심이자 자존심이었습니다.
정녕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모습이던가요? 우승만이 전부인가요? 성적지상주의를 그토록 비판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왜 그렇게 스포츠에 있어서 만큼은 무조건적인 승리를 바라는 것인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 카이져 김홍석[사진제공=KIA 타이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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