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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의 꽃 보다 야구

삼성의 김승관, '우-승관'이라 불렸던 사나이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7. 11.

자신이 출생한 지역에서 야구를 시작한 선수들은 모름지기 그 지역을 연고로 하는 프로팀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 지역 연고팀을 응원하면서, 자기 지역 출신 선수들을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연고’에 연연하지 않고 실력 있는 선수들을 뽑지만, 적어도 연고권 우선 지명(1차 지명)이 있었을 때까지만 해도 ‘연고지’에 대한 애착이 비교적 강했던 것도 사실이다. 1993년 삼성에 입단한 양준혁이 “내 몸에는 파란 피가 흐른다.”라고 이야기했던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프로는 팬들의 사랑을 포함하여 유망주들의 꿈을 먹고산다.

그리고 여기 또 다른 ‘파란 피’를 품고 있는 사나이가 있다. 그 주인공은 현재 대구 상원고등학교(옛 대구상고) 코치로 재직 중인 김승관(34). 1990년대 중반, 경북고 이승엽(요미우리 자이언츠)과 함께 ‘좌-승엽, 우-승관’이라고 불렸던 바로 그 김승관이다.


▷ 고교 2년생 김승관, 전국대회 MVP를 품다.


좌완투수였던 이승엽과는 달리 우타자였던 김승관은 고교 2학년 때부터 ‘비범함’을 자랑했던 유망주였다. 특히, 1993년 대통령배 대회에서는 여러 3학년 ‘형님’들을 제치고 최우수 선수(MVP)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결승전에서 안타 두 개 쳤고, 또 수비에서는 위기 상황에서 폭투도 잡아냈죠. 그런데 그때는 MVP를 기자단 투표로 결정했거든요. 그 모습에 후한 점수를 주신 것 같았습니다."

보통 감독 추천으로 MVP가 결정되는 현 고교야구 특성상, 김승관은 당시에 ‘실력’으로 당당하게 최우수 선수가 된 셈이었다. 그래서 김승관 본인도 “지금이었다면 2학년이었던 내가 MVP가 되긴 힘들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굳이 기자단 투표를 거치지 않더라고 고교 2학년생이 최우수 선수가 되기란 쉽지 않다. 경북고 임신근(1967)과 남우식(1970), 서울고 김동수(1984), 부산고 추신수(1999) 정도가 대통령배에서 2학년 MVP로 선정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활약은 준결승전에서도 빛이 났다. 당시 팀이 지고 있던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김승관은 동점 홈런을 포함하여 역전 결승포까지 쏘아 올리며, ‘연타석 홈런’을 기록했다. 이러한 그의 활약을 보고도 프로 구단이 가만히 있었다면 그것이  더 이상했을 일이었다. 이때가 김승관 야구 인생에서 무서울 것이 없던 시기였다.

“자신감이 최고조에 올랐을 시기였죠. 이후 야구하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실력보다는 자신감이 선수들에게는 큰 무기가 됩니다. 자신감이 최고예요.”


▷ 2군 생활을 버틴 원동력, “내가 삼성 팬이기에”

고교 졸업과 함께 김승관은 ‘예상대로’ 계약금 9,500만 원에 삼성 라이온스에 입단했다. 대졸 신인들이 프로에 지명되는 것이 당시의 ‘대세’임을 감안해 보았을 때 고졸 김승관의 입단 계약금은 상당히 파격적인 액수였다. 이에 당시 삼성 구단은 ‘좌완투수’ 이승엽과 함께 김승관마저 입단시키자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좌-승엽, 우-승관’ 듀오를 모두 품에 안았다는 사실은 타 구단의 부러움을 살만도 했다. 이제 남은 것은 두 입단 동기가 나란히 대구구장 그라운드에 서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깨 부상으로 더 이상 투수를 할 수 없었던 이승엽이 타자로 전환하면서부터 변수가 생겼다. 그만큼 김승관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못한 것이었다. 간혹 이승엽이 외야로 출장했던 경기에서는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그 비중은 시간이 갈수록 작아지기 시작했다. 이승엽과 더불어 양준혁이 라인업에 버티고 있었던 것도 김승관에게는 부담이었다. 이에 김승관은 ‘더 나은 내일’을 위하여 2군을 전전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김승관의 실력이 다른 선수들에 비하여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2군 리그에서 여러 차례 타율/홈런 1위를 했기 때문.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스물여섯 살 때까지만 해도 자신감은 있었어요. 그런데 2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자신감이 점차 없어지더라고요. 실력이 아니라 자신감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 10년간의 2군 생활을 되돌아 본 김승관의 말이다.

그러나 보통 선수들 같으면, 10년은 고사하고 5년도 채 못 되어 2군 생활을 버티기 힘들어 한다. 그만큼 열악하고, 또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원동력으로 2군 무대에서 10년 이상 견딜 수 있었을까.

“제가 어렸을 때부터 삼성 팬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삼성’ 하면 밥 먹다가도 숟가락을 놓고 야구를 볼 정도로 ‘광팬’이었죠. 그래서 ‘나는 삼성에서 잘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삼성 팬이니까요. 다른 팀에서 잘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쯤 되면 ‘김승관의 몸속에도 파란 피가 흐른다.’라는 이야기가 성립될 법하다.


▷ 2군 무대의 가장 위대한 타자

그런 김승관의 1군 무대 첫 홈런은 2004년에서야 터져 나왔다. 입단 동기 이승엽의 일본 진출로 그에게 기회가 온 것도 한 몫 했다. 그러나 시즌 중반, 그의 거취가 바뀌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이었다. 바로 부산이었다.

▲ 김승관은 1군 무대에서 3개의 홈런을 작렬시켰다. 그러나 그 중 두 개가 롯데 유니폼을 입고 기록했다. (사진=롯데 자이언츠 구단 제공)

2004시즌 중반, ‘팀 이탈’ 문제를 일으켰던 노장진과 함께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한 김승관은 10년간의 2군 생활을 지탱해 주는 힘이었던 ‘삼성’과 그렇게 헤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새로운 출발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데뷔 첫 홈런을 포함하여 두 개의 대포를 쏘아 올리며, 나름대로 거둔 것이 많았던 한 시즌을 보냈다.

그랬던 2006시즌, 김승관은 또 하나의 ‘대포’를 쏘아 올렸다. 공교롭게도 상대는 친정팀 삼성이었다. 7월 16일 열린 삼성과의 홈경기에 나선 김승관은 0-0으로 팽팽히 맞선 4회 말 공격서 상대 투수 임동규를 상대로 선제 결승 쓰리런 홈런을 작렬시키며, 친정팀을 울렸다. 14-0의 대승을 알리는 귀중한 홈런포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후 3루 요원이었던 이대호가 1루수로 옮기는 등 또 다시 기회를 잃어버린 김승관은 다시 2군 무대를 전전해야 했다. 그리고 2007시즌, 1군 무대에서 단 5경기에만 모습을 드러낸 김승관은 그 해 2군 남부리그 홈런왕(12개) 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했음에도 불구, 롯데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다.

“아마 2007년 10월이었을 겁니다. 구단(롯데)에서 연락이 왔는데, 방출됐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얼결에 ‘네!’라고 대답하고 수화기를 내려놨죠. 야구 그만두라는 말을 처음 들었으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죠. ‘20년간 해 온 야구, 이렇게 그만두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가득했죠.”

그렇게 김승관은 아까운 재주를 100% 보여주지 못한 채 그라운드를 떠냐야 했다. 그러나 그는 2군 통산 557경기에 출전하여 87홈런, 377타점, 571안타, 353사사구, 타율 3할 3리를 마크하며, 한국 프로야구 ‘퓨쳐스리그’에 큰 획을 그었던 선수임에는 분명했다.


▷ 모교 코치 3년, “후배들, 싸움꾼 됐으면...”

방출 이후 어쩔 줄 몰라 할 무렵, 그를 부르는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동문 선배이자 상원고 사령탑으로 재직 중인 박영진 감독이었다. 타격 코치를 맡아 달라는 제의에 김승관은 두말없이 모교로 달려갔다. 처음에는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에 대한 망막함이 많았지만, 김 코치는 후배이면서도 제자인 선수들이 가르침을 잘 받을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재 선수들의 분위기나 재능은 1993년 대구상고 시절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 김 코치의 말이다. 후배들이 ‘싸움꾼’이 되어야 하는데, 너무 순하다는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후배들이 참 착합니다. 그런데 뭐랄까... 순하다 보니, 예전과 같은 ‘싸움꾼 기질’은 점차 사라진 것 같습니다. 눈 돌리지 않고, 시키는 것은 다 하거든요. 어찌 보면 너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할 때가 많아요. 자가당착에 빠질 수도 있거든요. 하나를 가르치면, 이것을 응용해서 한 가지를 더 알아야 하는데, 그 ‘하나’만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제가 선수였을 때에는 자기 계발을 위한 노력이 강했던 시기였습니다.” - ‘싸울 줄 아는’ 선수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김 코치의 작은 바람이다.

그러한 김 코치는 최근 김태원 전임 투수코치가 공주고등학교로 적을 옮기면서 더욱 바빠졌다. 전에는 김태원 코치가 투수조를 이끌었지만, 지금은 김승관 코치가 혼자 투-타를 모두 신경 써야 하기 때문. 타자들에게 베팅 볼을 던져주면서, 펑고를 쳐 주기도 하고, 투수조 수비훈련도 동시에 시킨다. 그래서 경기 전 누구보다도 가장 바쁘게 움직인다. 하지만, 표정은 그 누구보다도 밝다.

▲ 김태원 전임 투수코치가 공주고로 적을 옮긴 이후, 김승관 코치는 전보다 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내가 못 했던 것, 후배들은 잘해 줬으면...

김 코치는 또한 후배들에게 ‘러닝’을 많이 강조한다. 그래서일까? 상원고는 찬스가 날 때마다 ‘히트 앤드 런’ 작전을 많이 써서 재미를 많이 본다. 그만큼 대부분의 선수가 빠른 발을 자랑한다.

“제 야구인생 중에서 가장 후회하는 것이 러닝을 소홀히 했다는 점입니다. 포지션을 불문하고 모든 선수들이 빨라야 합니다. 잘 뛰면, 스윙 스피드도 자연스럽게 빨라지거든요. 만약에 제가 1루수를 보면서도 발도 빨랐다면, 외야 수비도 가능했을 겁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는 단거리 러닝을 많이 시켜요. 제가 느려서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죠.

간혹 제가 후배들 앞에서 타격 시범을 보일 때가 있어요. 그러면 후배들이 감탄하면서 ‘선수 생활 더 하셔도 될 것 같은데, 너무 일찍 그만 두신 것 아니냐.’라고 이야기하죠. 그러면 저는 ‘내가 이렇게 치는데도, 느려서 성공 못 했다. 너희는 그렇게 되면 안 된다.’라고 이야기해 줍니다.” - 그만큼 자신이 못 했던 것을 후배들이 잘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재능에 비해 못 이룬 것이 많기에 사람들은 김 코치를 일컬어 ‘비운의 천재’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물론, 젊은 시절에는 그러한 생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여름 방학 때 야구를 시작했으니까, 상당히 늦게 시작한 셈이죠. 초등학교 경기를 거의 못 뛰다가 야구를 시작한 지 2년이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경기에 투입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들보다 노력을 더 많이 했죠. 야구 하면서, 방망이에 대한 욕심이 정말 많았습니다.” - 후회 없이 노력했기에, 미련을 남기지 않겠다는 김 코치의 의중이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 코치는 지금 2군에 머물고 있는 후배들에게 여러 가지를 주문한다. 자신감을 갖으라는 것부터 시작하여 1군으로 승격하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노리라는 이야기, 웨이트 트레이닝을 포함하여 자기 관리를 잘하라는 이야기도 덧붙인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지난해 상원고 졸업생 중 유일하게 프로에 입단한 박화랑에게 눈이 갈 수밖에 없다. 이에 김 코치는 “러닝을 소홀하게 하지 말고, 살만 찌우다가 둔해지지 말 것”을 강조한다.

그는 지도자의 길을 걸으면서, 현역 시절 못 다한 꿈을 이룬 것 같아 뿌듯하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특히, 지난해 대통령배 준우승, 대붕기 우승, 전국체전 우승 등으로 전국 고교 야구부 중에서 가장 빼어난 성적을 올린 이후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앞으로도 후배들을 도우면서, 다시 한 번 더 최고를 향하여 가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김승관 코치. “야구는 내 인생의 전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올해로 지도자 생활 3년차를 맞이하는 김 코치가 향후 ‘국민감독 김인식’ KBO 기술위원장과 같은 훌륭한 지도자로 거듭나기를 기원해 본다.

// 글, 사진 =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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