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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타임스 필진 칼럼

박찬호-이승엽, 살아있는 두 전설의 만남

by 카이져 김홍석 2011. 2. 2.

박찬호와 이승엽(이상 오릭스 버팔로스), 199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야구사를 거론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투-타의 두 거물이다. 투수와 타자로서 포지션도 달랐고, 박찬호는 미국에서, 이승엽은 한국과 일본서 선수생활의 전성기를 보내는 등 서로 활약한 무대도 달랐지만, 알고 보면 두 사람의 야구인생 궤적은 전성기에서 위기와 극복에 이르기까지 은근히 닮은 구석이 많다.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인 박찬호는 풀타임 빅리거가 된 96년부터 다저스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1년까지 80승을 달성했고, 5시즌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선발투수로 성장했다. 이승엽도 삼성에서 보낸 96년부터 2003년까지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홈런타자로 승승장구하며 아시아 홈런 신기록(56)을 갈아치우는 등 국민타자로 명성을 날렸다.

 

비슷한 시대를 풍미한 두 영웅이지만 인연이 닿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심지어 대표팀에서도 번번이 엇갈렸다. 박찬호는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참가해 금메달을 따냈고, 이승엽은 이후 2000년 시드니올림픽(동메달)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금메달)에 출전해 한국야구에 메달을 선사했다.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도 박찬호가 아시아예선 당시 주장으로 나섰던 반면, 이승엽은 이후인 최종예선 때부터 승선해 본선에서 한국야구에 첫 금메달을 안기는데 기여했다.

 

두 사람이 유일하게 같은 팀에서 한솥밥을 먹은 것은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다. 김인식 감독이 이끌던 대표팀에서 두 영웅은 운명처럼 조우했다. 멤버로 치면 지금도 역대 최강의 드림팀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이때의 WBC 대표팀이다. 최고들의 만남은 곧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냈다. 대표팀에서 박찬호는 마무리와 선발투수를 번갈아 가며 맡았고, 이승엽은 부동의 4번 타자로 활약하며 한국야구의 4강행을 합작했다.

 

당시 대표팀 사령탑을 맡았던 김인식 KBO 기술위원장은 톱스타인 박찬호와 이승엽이 앞장서서 솔선수범하면서 투타의 기둥 역할을 해준 덕에 팀의 중심이 잡혔다고 회상했다. 자존심이 강한 스타플레이어들이 뭉친 대표팀에서 중고참격이었던 두 해외파 선수들의 성실함과 이타성은 많은 후배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김인식 위원장은 아시아예선 당시 쟁쟁한 투수들이 많았던 대표팀에서 전문 마무리요원들을 제치고 박찬호에게 마무리를 맡겼다. 박찬호는 선수생활 내내 선발로만 활약했지만, 김인식 위원장은 큰 무대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박찬호의 경험과 노련미를 높이 샀다. 자칫 불만을 살수도 있었지만, 박찬호는 자신보다 팀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솔선수범의 자세로 마무리 보직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그렇게 박찬호는 아시아예선에서는 마무리로 투입됐고, 4강에서는 일본과의 대결에서 선발로 복귀해 역투하는 등, 4경기에서 3세이브를 평균자책점 ‘0.00’의 만점활약을 펼쳐 보였다. 이 대회는 훗날 불펜투수 박찬호의 가능성을 메이저리그에 알리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었다.

 

이승엽은 WBC에서 타율 0.333, 5홈런 10타점을 기록하며 4번 타자로서 제 몫을 다했다. 당시 대표팀은 투수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상황이었기에 그만큼 이승엽의 활약이 절실했다. 이승엽은 일본과의 아시아예선 최종전과 2라운드 미국전 등 고비마다 홈런을 터뜨리며 클러치히터로서의 진가를 맘껏 뽐냈다.

 

박찬호와 이승엽은 야구뿐만 아니라, 앞장서서 후배들을 독려하며 분위기를 띄우는데 앞장섰고, 코칭스태프의 지시도 군말 없이 성실하게 따르는 등 헌신적인 모습으로 많은 귀감이 되었다. 대한민국이 WBC같은 큰 무대에서 미국, 일본 등의 강팀들을 연파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고참과 스타급 선수들이 먼저 앞장서서 솔선수범하는 팀워크에 있었다.

 

둘은 어쩌면 생애 마지막 태극마크가 될지도 모를 지난 2009년 제2 WBC 참가를 정중하게 고사해 아쉬움을 남겼다. 박찬호는 WBC를 앞두고 대표팀 은퇴를 공식 선언하면서 눈물까지 보였다. 이제는 더 이상 박찬호와 이승엽이 같은 유니폼을 입고 뛰는 모습은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인연은 언제나 뜻하지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 요미우리에서 부진을 딛고 일본 무대에서의 부활을 꿈꾸는 이승엽과 빅리그에서의 17년 생활을 정리하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 박찬호는 운명처럼 오릭스에서 다시 만나게 됐다. 전성기가 지났다는 평가도 있지만,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두 톱스타가 한 팀에서 조우하게 됐다는 상징성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다.

 

두 사람은 화려한 야구인생의 정점을 지나 극심한 부침의 시기를 보내야 했던 과정도 비슷하다. 박찬호는 2002 FA 대박을 터뜨리며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했지만, 허리부상의 악화와 아메리칸 리그 적응 실패로 하향세를 겪었고, 그 결과 한때 메이저리그 최악의 먹튀라는 혹평을 듣기도 했다. 이 계약은 지금도 결과가 좋지 않았던 FA 계약 사례를 거론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해 박찬호에게는 야구인생의 오점을 남긴 주홍글씨와도 같다.

 

이승엽도 만만치 않다. 일본진출 3년만에 정상급 스타로 발돋움하며 요미우리와 4년 장기계약을 맺으며 연봉 대박을 맞았지만, 이후 계속된 부상과 슬럼프로 주전경쟁에서 밀려났다. 그 후로는 오랜 시간 2군에서 눈칫밥을 먹는 등, 야구인생 최대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불펜 투수로 재기에 성공하며 124승으로 아시안 투수 최다승 기록을 경신, 17년 빅리그 도전사에 유종의 미를 거뒀다. 선수생활의 막바지를 앞두고 있는 박찬호는 생애 처음 도전하는 일본 무대에서 다시 한 번 빅리그에서 못다한 선발의 꿈에 도전하고 있다.

 

또한, 박찬호의 오릭스행은 향후 한국으로 복귀하기 위한 가교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많다. 은퇴가 머지않은 시점에서 최대한 다양한 야구문화와 시스템을 경험하며 배워보고 싶다는 박찬호의 의욕도 일본행을 선택한 이유다.

 

이승엽의 부활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요미우리에서의 상처뿐인 4년을 정리하고 오릭스에서 제2의 도약을 꿈꾸는 이승엽에게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절박함이 있다.

 

따라서 선수로서 전성기와 시련기의 극단을 모두 경험해본 선배 박찬호의 존재는 이승엽에게도 좋은 롤모델이 될 전망이다. 이대로 야구인생을 실패자로 끝낼 수 없다는 이승엽의 독기와 자존심은 다음 시즌 충분한 출전기회를 보장한 오릭스에서의 부활을 기대할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들 두 전설의 만남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까? 전성기가 지났다는 평가도 있지만, 팬들의 입장에서는 한국야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두 영웅이 같은 팀에서 뛰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만으로 설레고 있다. 미국으로 치면 은퇴한 그렉 매덕스(통산 355)와 켄 그리피 주니어(통산 630홈런)가 같은 팀에서 뛰는 것과 맞먹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릭스 유니폼을 입은 박찬호가 승리투수가 되고 이승엽이 장쾌한 홈런포와 결승타점으로 승리 도우미가 되는 모습을 올해는 자주 볼 수 있을까? 그들이 한솥밥을 먹는 무대가 한국이 아닌 일본이라는 점은 다소 아쉽지만, 그들이 한 팀에서 승리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야구팬들의 2011년은 기대로 가득 차 있다.

 

// 구사일생 이준목
[사진=오릭스 버팔로스 홈페이지, 홍순국의 순 스포츠, 삼성 라이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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