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수 감독대행이 처음 SK의 유니폼을 입었을 때만 해도 서로가 생각했던 그림이 이런 모습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미국 땅에서 눈물 젖은 빵을 씹으며 메이저리그 코치까지 지냈던 이만수는 그리운 고향 땅에서 자신이 꿈꿔오던 선진야구를 구현해보겠다는 의욕에 불탔고, SK는 이만수를 통하여 구단이 지향하는 ‘스포테인먼트’의 완성을 꿈꿨다.
하지만 그들의 사이에는 ‘야신’이라는 넘을 수 없는 거목이 존재하고 있었다. ‘야구는 감독이 하는 것’, ‘리더는 결과로서 말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50년 넘게 한 우물만을 파온 백전노장 김성근 감독, 반면 ‘선수와 팬들 위주의 야구’를 제일시하는 미국식 야구의 영향을 받은 스포테이너형 수석코치는 처음부터 지향하는 야구철학이 너무도 달랐다. 그리고 철학이 맞지 않는 두 사람을 ‘1인자’와, 그 ‘1인자를 위협하는 2인자’로 설정하며 한 묶음으로 배치해놓은 SK 구단의 무리수가 예고된 비극을 부른 셈이다.
SK 구단은 사실 김성근 체제가 이토록 큰 성공을 거두며 장수하리라고는 처음부터 계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김성근 감독은 SK에 오기 이전까지 한국시리즈 우승은 단 한 차례도 없었고, 야구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야구장인’과 ‘시대에 뒤처진 구식 감독’ 사이에서 엇갈린 평가를 받던 인물이었다. 고령으로 인한 건강상의 문제도 숨은 변수였다.
SK가 김성근을 필요로 하던 시기에, SK는 아직 제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리빌딩을 시도하던 때였다. 김성근 감독은 ‘리빌딩 전문가’라는 칭호를 얻기는 했지만, 그때만해도 ‘야신’이나 우승청부사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SK도 김성근 감독의 영입으로 어느 정도의 성적 향상은 기대했지만, 우승까지는 기대하지 않았고, 2년 뒤에 이만수 체제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해줄 정도로만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을 넘어 김성근 SK는 지난 4년간 세 차례나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며 프로야구사의 새로운 왕조로 거듭났다. 엄청난 훈련량과 불펜 야구, 철저한 데이터에 근거한 잦은 작전구사, 감독 위주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대표되는 ‘김성근식 야구’는 단지 SK의 우승이라는 결과물을 넘어 한국프로야구의 트렌드를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을만큼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 김성근이 없는 SK야구는 곧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팀 전반에 미친 영향력은 역대 어느 감독과도 비교가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구단의 입장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감독은 성적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이기는 하지만, 구단은 단지 성적만이 아니라 좀더 비즈니스적인 관점에서 구단의 운영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런 면에서 호성적과 관중동원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SK야구에 대한 대외적 ‘이미지’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분명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그러나 소통 과정에서 김성근 감독은 지나치게 원칙만을 강조하며 비타협적인 태도를 견지했고, 구단은 구단대로 팀 역사상 최대의 영광을 안긴 노감독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부족했다.
이로 인하여 중간에서 애매한 상황에 놓인 것은 이만수 코치였다. 김성근 감독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구단의 뜻으로 영입된 수석코치, 그것도 언제든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었던 잠재적 2인자였던 이만수를 일단 품에 안았다. 모두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평가하는 가운데서 두 사람은 시종일관 불화설을 부정했고, 팀도 꾸준히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갈등은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김성근 감독은 수시로 “이만수도 내 제자” 혹은 “자신의 영원한 파트너”라고 칭했고, 이만수 코치 역시 “우리는 엄부자모의 환상적 궁합”이라고 자평하며 서로에 대한 존중을 드러냈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사적인 감정은 없다고 할지라도 추구하는 길이 달랐던 것은 숨길 수 없었다. 4년 반을 함께해온 시간에도 불구하고 이만수 코치는 김성근 감독의 ‘측근’이 되지는 못했다. 김성근 감독의 실질적인 오른팔은 가토 하지메와 세리자와 유지 등 일본인 코치들이었고 오히려 이만수는 임기 중 SK 2군 감독과 수석코치를 오르내리는 ‘질책성 인사’를 여러 번 당하며 팀 내에서 확고한 2인자로 자리잡지 못했다.
김성근 감독이 SK와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된 것이나, 직접 사임을 결심하게 된 계기도, 구단 측이 이만수 감독과의 ‘불편한 동거’를 계속 끌고 가려던 것이 결국 가장 큰 빌미가 되었다. SK는 김성근 감독과의 재계약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만수의 이름을 거론했고, 김성근 감독은 이에 대하여 ‘예의 없는 행동’이라며 불쾌감을 표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감독선임은 구단의 고유권한이지만, 이유야 어찌됐든 재계약을 논의하는 자리에 현 감독에게 공공연하게 다른 후보의 이름을 거론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경우에 어긋난 처신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만수 역시 이러한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당시 메이저리그 코치로서 구단과 선수들의 신망을 받으며 어느 정도 안정된 경력을 쌓아가는 과정이었고, 1~2년을 더 기다렸더라면 더 일찍 다른 구단에서라도 감독으로 데뷔하는 기회를 얻었을지 모른다. 현재 프로야구 8개 구단의 감독과 수석코치 중에서는 그보다 후배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이만수는 자신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낸 SK의 제안을 승낙했고, 야구에 관한 지향점이 전혀 다른 감독과 구단 사이에서 혼란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책임은 김성근의 잘못도, 이만수의 잘못도 아니다. 어쩌면 이번 사태로 인하여 이만수 감독대행도 김성근 전 감독 못지않은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김성근 감독과 비교할 수는 없어도, 이만수 역시 야구인생 외길을 걸으며 한국야구에 많은 업적을 남긴 존경 받을만한 야구인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인하여 이만수 감독대행은 졸지에 구단과 결탁하여 대선배를 몰아내고 자리를 차지한 ‘몹쓸 사람’처럼 취급받고 있다. 시즌 중반에 갑작스럽게 투입되어 자신의 야구를 펼쳐 보일 수 있는 준비도 되지 않았고, 박수와 기대를 받으며 시작해야 할 데뷔전에서는 홈구장이 불에 타는 광경을 지켜보며 팬들로부터 입에 담지 못할 욕설까지 들어야 했다. 만일 이대로 성적이 추락한다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이만수 대행에게 쏠릴게 뻔하다. 전 감독과 구단의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구단 역사상 최고의 영광을 안겨준 전 감독과, 미래를 짊어진 새 감독간의 신구교체가 좀더 명예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어쨌든 이제 SK의 감독은 이만수다. 지난 4년간 그 어느 팀보다 개성이 뚜렷하고 누구보다 감독의 영향력이 강했던 팀을, 그것도 시즌 중에 180도 다른 성향의 감독이 물려받아 이끌어야 하는 전대미문의 상황이 어떤 결말을 맺을지 흥미롭다.
분명한 것은 이만수의 야구가 김성근과 같을 수 없고, 또 그렇게 돼서도 안 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김성근식 야구는, 곧 김성근 감독이기에 가능한 것일 뿐, 누가 흉내 내고 싶다고 함부로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성근의 야구가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무려 3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이만수의 야구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김성근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이만수의 야구는 ‘야구로서만’ 평가해야 할 일이다.
// 구사일생 이준목 [사진제공=SK 와이번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