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섭 사건으로 인해 뒤숭숭하던 야구판에 팬들을 미소 짓게 만드는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바로 ‘한국형 핵잠수함’ 김병현이 넥센 히어로즈와 계약하고 한국에서 뛰기로 결정한 것이다. 계약금 10억원에 연봉 5억원, 옵션 1억원까지 포함한 총액 16억원의 대형 계약, 그 내용도 놀랍지만 김병현이 한국을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다소 의외이면서도 반가운 일이었다.
최동원(58년생)-선동열(63년생)-박찬호(73년생)-류현진(87년생), 지난 30년 동안 한국 야구를 대표한다 할 수 있는 최고 투수들의 이름이다. 하지만 나이 차로 보면 박찬호와 류현진의 사이에 한 명쯤 더 있는 것이 보기에 좋을 듯싶다. 자신의 고집과 부상이라는 악재만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 사이에는 반드시 김병현(79년생)이라는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김병현의 복귀 소식이 전해지자 팬들도 대부분 반가워하는 눈치다. 하지만 당장 그가 10승을 거둘 수 있느냐는 질문이 던져지자, 그때부터는 의견이 갈리기 시작한다. 지난 몇 년 동안 별다른 실적이 없었던만큼 의견이 분분한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아쉬움이 느껴지는 건 ‘김병현은 이미 끝났다’는 일부의 시각이다. 그리고 최근에 야구를 좋아하기 시작한 10대나 20대 초반의 야구팬들은 김병현이라는 이름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왠지 모르는 서글픔이 느껴지기는 건 아마도 필자가 김병현과 같은 해에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추어 시절의 김병현은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1995년 청룡기 대회에서는 2학년 선수로는 매우 드물게 대회 MVP에 선정되었고, 이후 청소년 대표를 거쳐 성균관 대학교로 진학한 이후에도 대표팀 명단에서 빠지는 법이 없었다.
대학 2학년이던 1998년 7월, 김병현은 한미대학선수권에서 미국을 상대로 선발 등판했고 6.2이닝 동안 무려 15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는 놀라운 피칭을 선보였다. 사이드암으로 시속 150km를 웃도는 엄청난 공을 연거푸 뿌려댔으니, 제아무리 미국의 올스타급 타자들이라 해도 연신 헛방망이질을 할 수밖에.
그리고 그 해 가을, 박찬호를 비롯한 프로 선수들이 대거 참가해 나중에 ‘드림팀 Ⅰ’이라 불리게 되는 당시 야구대표팀에도 김병현의 이름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국과의 준결승전에서 그의 진가를 나타냈다. 4회부터 구원 등판한 김병현은 8연속 삼진을 잡아내는 등, 6이닝 동안 12탈삼진 퍼펙트를 기록, 부끄럽지 않은 활약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고 병역 혜택도 받았다.
이미 한미대학선수권 당시부터 김병현을 주의 깊게 살펴보던 메이저리그의 스카우터들은 박찬호가 참가하여 화제가 되었던 아시안게임에서 또 한 명의 보석을 발견했음을 깨달았다. 결국 김병현은 당시로서 메이저리그 역대 6위(!)에 해당하는 225만 달러의 엄청난 계약금을 받고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 입단했다. 그의 본격적인 성공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메이저리그를 즐겨 보는 야구팬들이 지금도 여전히 김병현이라는 이름을 잊을 수 없는 것은 이처럼 김병현이 가능성 높은 유망주였고, 또 그의 메이저리그 데뷔부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김병현의 빅리그 첫 등장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 현지에서도 충격과 경악 그 자체였다.
김병현은 마이너리그에서 수업을 받기 시작한 지 겨우 2개월만에 빅리그의 부름을 받았고, 1999년 5월 29일 뉴욕 메츠와의 원정경기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다. 일명 ‘케네디 스코어’라 불리는 8-7 한 점 차로 리드한 상황에서의 9회말 등판, 그 긴박한 상황에서 빅리그 등판이 처음인 이 20살의 애송이는 아무런 긴장감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특유의 썩소를 날리며 ‘당대 최고의 타자’ 마이크 피아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데뷔전을 1이닝 퍼펙트 세이브로 장식한 이 당찬 신인을 향한 스포트라이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듬해부터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활약하게 된 김병현은 중간과 마무리를 오가며 애리조나의 핵심전력으로 활약했다. 2000년의 14세이브(6승 6패 5홀드), 2001년의 19세이브(5승 6패 11홀드)를 거쳐, 본격적으로 팀의 주전 마무리로 활약하게 된 2002년에는 2.04의 뛰어난 방어율로 36세이브(8승 3패)를 기록하며 리그 정상급 마무리의 반열에 올라섰다. 당시 김병현의 나이는 만 23세였다.
“이제 만 23세가 된 어린 투수가 36세이브를 거뒀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위의 한 문장이 지니는 의미가 조금은 퇴색된 듯싶기도 하다. 하지만 10년 전만 하더라도 위 문장의 내용이 지니는 의미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100년이 넘는 메이저리그 역사에서도 저렇게 어린 나이에 한 팀의 주전 마무리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며 30개가 넘는 세이브를 기록한 선수는 김병현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선발-셋업-마무리의 투수분업 체계가 완성된 것은 메이저리그에서도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이루어진 일이다. 따라서 당시만 하더라도 팀의 승리를 책임져야 하는 마무리 보직은 상당한 경험을 갖춘 베테랑 투수에게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통산 600세이브라는 대기록에 빛나는 저 위대한 마무리 마리아노 리베라(통산 603세이브)와 트레버 호프만(601세이브)도 팀의 붙박이 마무리로 활약하며 30세이브 이상을 기록한 것은 3~4년의 경험을 쌓은 후 만 28세가 되어서였다.
김병현은 만 23세 이전의 나이에 30세이브 이상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였으며, 그 당시 벌써 통산 70개의 세이브를 기록하고 있었다. 2000~2002년까지의 3년 동안 252.2이닝을 소화하면서 무려 316개나 되는 탈삼진을 잡아냈을 정도로 구위가 뛰어났고, 방어율도 4.46-2.94-2.04로 해를 거듭할수록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는 호프만이 ‘역대 최고의 마무리’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고, 그 뒤를 리메라가 쫓아가던 형국이었는데, 15년쯤 후에는 김병현의 명성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왔다. 역대 6위에 대항하는 엄청난 계약금을 받고 입단한 특급 기대주가 2개월만에 마이너리그를 평정하고 빅리그에 입성, 풀타임 3년째에는 리그 정상급 마무리의 반열에 올라섰으니 당시 김병현을 향한 찬사와 기대가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하지만 이후부터가 문제였다. 김병현의 꿈은 마무리가 아닌 선발투수였고, 그걸 두고 구단과의 마찰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애리조나는 2003년 시즌 중반에 김병현을 보스턴으로 트레이드 했고, 그 해까지는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좋은 성적(9승 10패 16세이브 3.31)을 거뒀지만, ‘한국형 핵잠수함’ 김병현의 전성기는 사실상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는 모두가 아는 것처럼 부상과 부진에 신음하며 제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언론친화적이지 못했던 성격 때문에 대중의 관심으로부터도 점점 멀어지고 말았다.
실제로 김병현이 메이저리그에서 정상급 투수로 활약한 것은 2001년부터 2003년까지의 3년이 전부다. 벌써 10년여 전의 이야기이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올드 팬들이 그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향수에 빠져드는 것은, 김병현이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논할 정도로 대단한 가치를 지닌 특급 유망주였기 때문이 아닐까.
미국에서의 오랜 좌절과 실패의 시간, 그리고 지난해 일본에서의 아쉬웠던 시절을 뒤로한 채 김병현은 비로소 한국에 돌아왔다.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무려 13년 만의 귀환이다. 잘하고 말고를 떠나서 일단 그의 피칭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대가 된다.
김병현은 올해 우리나이로 34살,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성기가 완전히 끝났다고 말할 정도로 많은 나이도 아니다. 부상 전력은 있지만, 다행히(?) 어깨를 혹사시켰다고 평가할 정도로 20대 시절에 많은 공을 던지지도 않았었다. 부활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뜻이다.
만약 김병현이 임창용처럼 기적적으로 전성기적 구위를 되찾을 수 있다면 어떨까? 아마 그는 당대 최고의 투수다운 엄청난 활약을 보여줄 것이 틀림 없다. 그 시속 150km의 꿈틀거리는 직구를 그 누가 제대로 건드리기나 하겠는가. 아직은 실현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지만, 상상만으로도 기대가 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2012시즌에는 박찬호와 이승엽, 그리고 김병현이 모두 한국 무대에서 뛰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전망이다. 이미 그 사실만으로도 30대 이상의 야구팬들은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야구팬들을 뿌듯하게 만들었던 세 선수였으니 말이다.
김병현의 한국 복귀는 마치 ‘돌아온 탕자’ 이야기의 느낌이 조금 묻어나는 듯 해서 감회가 더욱 새롭다. 한때는 두 번 다시 김병현이 마운드에서 공을 뿌리는 모습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기에 더더욱 그렇다. ‘한국형 핵잠수함’의 멋진 부활을 기대해 본다. 김병현, 팬들 곁으로 돌아와줘서 정말 고맙다!
// ‘너무나 기뻐서 눈물이 앞을 가리는’ 카이져 김홍석
블로거는 독자 여러분의 추천(View On)을 먹고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