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투수 문제를 놓고 고민을 거듭하던 SK가 결국 ‘선수 교체’를 선언했다. 기량은 좋으나 몸 상태 때문에 계속 속을 썩여왔던 아퀼리노 로페즈(37)를 퇴출시키는 대신, 새 외국인 투수로 메이저리그 출신의 데이브 부시(33)를 영입하기로 결정한 것. 하지만 그 과정이 그다지 매끄럽진 않았기에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로페즈는 6월 5일 두산과의 경기에 선발로 등판해 6이닝 3실점의 퀄리티스타트로 시즌 3승째를 따냈다. 몸 상태가 문제일 뿐, 일단 마운드에 오를 수만 있다면 여전히 국내에서 통할만한 투수라는 것을 실력으로 입증한 것이다. 문제는 그 경기 전에 이미 새로운 외국인 투수에 대한 내용이 세상에 공개되었다는 점이다.
5일 오전 한 언론이 ‘SK가 이미 데이브 부시와 계약을 완료했다’는 내용의 보도를 했다. 이만수 감독 역시 경기에 벌어지기 전에 가졌던 사전 인터뷰에서 그와 같은 사실을 인정했다. 결국 로페즈는 이미 퇴출이 확정되고, 심지어 후임자까지 정해진 상황에서 마운드에 오른 셈이다.
과거 IMF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우리나라에서도 ‘명예퇴직’의 칼바람이 거세게 불어 닥친 적이 있었다. 일부 회사에서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사원을 내보내기 위해 하루 아침에 책상과 의자를 치워버리는 등, 해당 사원이 수치심을 느끼게 만들어 스스로 사표를 내게끔 종용하는 치졸한 일을 벌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로페즈는 책상과 의자가 치워진 것도 모자라 그의 후임자까지 이미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자리는 치워놓고도 아직은 계약이 해지되지 않았으니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일을 하라는 지시까지 받았다. 아무리 프로의 세계가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에 따라 흘러간다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이만수 감독에 따르면 로페즈의 마지막 등판은 본인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선발진이 붕괴되어 마땅히 올릴 선수가 없었던 팀 내부의 사정도 크게 작용했다. 로페즈는 이번이 마지막 등판임을 알고 선발 마운드에 올랐고, 끝으로 한국 팬들에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 던졌다. 하지만 그 등판이 ‘기사회생의 기회’가 되는 일은 없었다. 로페즈가 좋은 투구로 팀의 승리를 이끌었으나, 이미 그의 퇴출은 확정된 상태였고, 심지어 후임자까지 정해진 후였다. 과연 그 한 경기는 로페즈와 SK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던 걸까.
SK가 로페즈의 입장을 고려했다면 적어도 후임 선수와의 계약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은 그 경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철저히 단속을 했어야 했다. 아무리 로페즈가 ‘용병’의 신분이고, 계약에 의해 한국에서 뛰고 있다지만, 그 정도 ‘예의’는 지켜주는 것이 우리나라 특유의 미덕이 아니었던가.
얼마 전 KIA 역시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외국인 투수 교체를 결정한바 있다. 호라시오 라미레즈(33)와 앤서니 르루(31), 두 명의 외국인 투수가 엄연히 로스터에 포함되어 있는 상황에서 새 외국인 투수 헨리 소사(27)의 영입을 확정했고, 그때부터 기존의 두 선수를 저울질하며 퇴출될 한 명을 결정했다. 어디까지나 그들을 철저하게 ‘외인’ 취급했기에 할 수 있었던 행동이다.
한국 선수가 일본 프로야구에서 이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면, 과연 국내의 언론과 팬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때도 ‘용병이기 때문에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을까? 마지막임을 알면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유종의 미를 거둔 로페즈의 프로다운 자세는 빛났지만, 그 과정에서 SK 구단이 보여준 행동은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로페즈처럼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이었고, 지난 3년 동안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선수조차 그저 소모품으로 취급받는 한국 프로야구. 올해로 외국인 선수 제도가 도입된 지 무려 15년째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구단의 시선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과연 한국의 용병제도는 발전하고 있는 것일까.
// 카이져 김홍석 [사진제공=SK 와이번스, KIA 타이거즈]
☞ 이 글은 <마니아리포트>에 기고한 글입니다.(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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