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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져의 야구 칼럼/MLB Stories

아듀, 양키스타디움(Yankee Stadium)~

by 카이져 김홍석 2008. 9. 23.


지난 86년 동안 세계 최고의 프로팀이 홈구장으로 사용해왔던 양키스타디움이 그 마지막을 팬들에게 고했다. 사진과 함께 양키스타디움의 지난 여정을 간략하게 돌아본다.


현지시간으로 21일 벌어진 뉴욕 양키스와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경기는 ‘양키스타디움’에서 벌어진 최후의 경기로 기록될 것이다. 그 경기에서 양키스는 7:3으로 승리했고, 자신들의 추억이 담긴 구장에서의 마지막 5경기를 모조리 승리하는 것으로 팬들에게 보답을 했다.


기념할만한 마지막 경기에서 선발로 등판해 승리투수가 된 것은 양키스에서 데뷔하여 4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함께 했던 앤디 페티트였으며, 9회말 최후의 순간에 마운드를 지킨 것은 ‘양키스 역대 최고의 마무리’인 수호신 마리아노 리베라였다.


경기가 지니는 의미 때문에 시작되기 전부터 각종 행사가 먼저 열렸다. 양키스 소속으로 활동했던 전설적인 선수들이 모두 총출동해 자신들이 현역 시절 활약했던 수비 포지션에 서서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자신들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구장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홈플레이트 위에 서 있는 등번호 8번의 백발노인이 바로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긴 양키스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MVP 3회 수상)다.


또한 전광판에는 베이브 루스의 영상이 나오면서 길 건너편을 보라는 자막을 내보내고 있다. 내년 시즌부터 양키스는 현재 사용하고 있던 구장 바로 건너편에 2006년부터 착공하여 완공을 눈앞에 둔 ‘New 양키스타디움’으로 이사를 간다.


당연히 이날은 수많은 팬들이 관중석을 꽉 채우고는 그들의 추억이 담긴 구장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사진에서 우측의 관중석 너머로 보이는 흰 동그라미 안의 건물이 새롭게 지어지고 있는 ‘뉴 양키스타디움’이다.


뉴욕 양키스는 원래부터 뉴욕에 연고를 두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 이름도 ‘양키스’가 아니었다. 1901년 아메리칸 리그가 태동할 당시 생겨난 이 팀이 제일 먼저 연고를 잡은 곳은 바로 볼티모어였으며 당시 팀 이름은 ‘오리올스’였다. 2년 후 연고지를 뉴욕으로 옮기면서 팀 이름은 ‘하일랜더스’로 바뀌었고 이후 ‘양키하일랜더스’를 거쳐 지금과 같은 ‘양키스’라는 명칭으로 굳어진 것이다. 양키스타디움의 고별전 상대로 현재의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선택(?)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 베이브 루스가 지은 집

양키스타디움은 ‘베이브 루스가 지은 집’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뉴욕으로 연고지를 이전한 양키스는 내셔널리그의 뉴욕 자이언츠(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폴로그라운드를 빌려 쓰고 있었다. 하지만 1920년에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인 12만 5천달러를 투자해 보스턴 레드삭스로부터 베이브 루스를 데려온 양키스는 그의 홈런쇼에 힘입어 엄청난 이득을 챙겼고 팀의 인기 면에서도 단숨에 자이언츠를 능가해버렸다.


자존심이 상한 자이언츠는 양키스에게 더 이상 구장을 빌려줄 수 없다는 일방적인 통고를 했다. 루스가 뛰는 한 흥행은 계속될 것이라 믿었던 양키스는 과감하게 자신들의 집을 짓기로 결심을 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양키스타디움이다. 양키스타디움은 1923년에 정식으로 개장했고 그 해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양키스의 전성시대도 함께 시작되었다.


구장 개막전에서 홈런을 축포를 쏘아 올리며 팀의 4:1승리를 이끌었던 루스는 그 막강한 홈런포를 앞세워 양키스 왕조의 탄생을 알렸다. 그의 정신은 이후 루 게릭, 화이티 포드, 조 디마지오, 요기 베라, 미키 맨틀, 로저 메리스, 서머 먼슨 등으로 이어졌고 최근에는 데릭 지터알렉스 로드리게스가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양키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사용한 지난 86년 동안 양키스는 무려 26번이나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차지했고, 그 외에도 별도로 13번이나 아메리칸 리그 정상에 올랐다. 86년 동안 홈경기에서 4133승 2430패 17무승부를 기록, 63%라는 엄청난 승률은 너무나 대단해서 할 말을 잃어버릴 정도다.


양키스타디움의 한 벽면에서 볼 수 있는 저 문장은 조 디마지오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지난 세기 최고의 팀이었던 양키스 소속의 선수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지금도 메이저리그에서 떠돌고 있는 “모든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양키스에서 뛰고 싶어 한다”라는 말은 단지 이 팀이 연봉을 많이 주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 3번의 퍼펙트게임

양키스는 최고 승률과 최다 월드시리즈 우승 외에도 또 하나 보유하고 있는 기록이 있다. 바로 최다 퍼펙트게임 기록이 그것이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17번 나왔던 퍼펙트게임은 양키스 소속 선수들의 손에서 3번 이루어졌고, 그것은 모두 양키스타디움에서 일어났던 역사다.


1956년 브루클린 다저스(현 LA 다저스)와의 월드시리즈 5차전에 등판한 돈 라센(왼쪽 사진)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퍼펙트게임을 연출해낸다. 요기 베라와 베터리를 이룬 그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환상적인 피칭을 선보이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라센은 통산 81승 91패 방어율 3.78의 평범한 성적을 남기고 그라운드를 떠났지만, 이 날 보여준 단 한 번의 피칭으로 인해 양키스의 레전드로 남아 양키스타디움의 최후를 빛낼 선수로 초대받았다.(두 번째 사진의 마운드의 왼쪽에서 세번째 18번을 입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올해로 79세가 된 라센이다.)


양키스타디움에서 또 한 번의 퍼펙트 경기가 나온 것은 42년이 지난 1998년이 되어서였다. 5월 17일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데이빗 웰스(오른쪽 사진)가 탈삼진 11개를 포함한 완전무결한 피칭으로 4:0 퍼펙트게임을 달성한 것이다. 일요일을 맞이해 경기장을 가득 메운 홈팬들 앞에서 생애 최고의 감격을 누린 120kg의 거구 웰스가 껑충 뛰어오르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1년 전 자신보다 한 수 아래로 여겼던 동갑내기 동명이인 데이빗 웰스가 퍼펙트를 달성하는 것을 벤치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당시 양키스의 에이스 데이빗 콘은 1999년 7월 18일 몬트리올 엑스포스(현 워싱턴 내셔널스)를 상대로 10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며 퍼펙트 쇼를 펼쳤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자신들의 선배인 요기 베라를 기리는 ‘요기 베라의 날’ 행사가 펼쳐진 일요일이었다. 콘을 들어 올리고 있는 포수는 지금은 양키스의 감독이 된 조 지라디이며, 왼쪽에는 축하하고 있는 로저 클레멘스의 모습도 보인다.


▶ 그 외의 기억에 남는 사건, 사고들

로저 매리스는 1961년 10월 2일 베이브 루스를 추종하는 팬들의 온갖 협박과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61호 홈런을 쏘아 올리면서 베이브 루스의 홈런 기록(60개)을 경신했다. 37년 후인 1998년 마크 맥과이어를 시작으로 새미 소사와 배리 본즈가 그의 기록을 넘어서는 바람에 지금은 7위로 내려앉았지만, 그들 모두가 약물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돌이켜봤을 때 이 기록은 재조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Mr. October’라 불리는 레지 잭슨은 1977년 월드시리즈 6차전에서 첫 번째 타석에서 볼넷으로 걸어 나가 팀의 첫 득점을 올린 후 이어진 3번의 타석에서 초구만 3번 휘둘러 모두 담장 밖으로 넘겨 버렸다. 그의 21년의 선수생활 동안 양키스에 몸담았던 것은 겨우 5년 밖에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팬들이 여전히 잭슨의 이름을 기억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가을의 사나이’였기 때문이다.


양키스타디움에서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해서 모두 양키스에게 좋은 일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1985년 8월 4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경기에서는 당시 40세의 탐 시버에게 9이닝 6피안타 7탈삼진 1실점의 완투승의 재물이 되어야만 했다.


이것은 시버의 개인 통산 300번째 승리였으며, 300승과 3000탈삼진을 모두 달성한 그는 훗날 역대 최다 득표율(98.84%)로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1996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에서는 3:4로 뒤지고 있던 8회말 데릭 지터의 타구를 양키스 팬인 제프 마이어라는 소년이 외야수의 글러브에 들어가기 직전에 걷어내 버렸다.


이 사건 하나로 지터는 양키스에 행운을 가져다주는 사나이로 이름을 날리며 지금의 명성을 쌓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게 되었고, 4승 1패로 볼티모어를 제압하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양키스는 레지 잭슨이 활약하던 78년 이후 18년 만의 우승을 차지한다.


하지만 마이어라는 저 소년은 볼티모어 팬들의 엄청난 협박에 꽤나 오랫동안 시달려야만 했다.


2000년에는 뉴욕 양키스와 뉴욕 메츠가 사상 처음으로 월드시리즈에서 만났고, 그 유명한 ‘지하철 시리즈’의 첫 경기가 양키스타디움에서 벌어졌다.


오른쪽이 지난해까지 양키스의 감독으로 있다가 올해 LA 다저스로 자리를 옮긴 조 토레 감독이고, 왼쪽은 현재 일본 프로야구 지바 롯데 마린스의 감독으로 있는 바비 발렌타인이다.


당시의 시리즈 2차전에서는 불미스러운 사건도 있었다. 평소에도 마이크 피아자를 싫어해 머리를 향해 공을 던지곤 하던 로저 클레멘스가 타격을 하다가 부러진 방망이를 피아자를 향해 다시 던진 것이다. 클레멘스가 피아자를 싫어했던 것은 단지 ‘피아자가 자신의 공을 잘 때린다’는 이유였기 때문에, 그의 추잡한 성격은 만인의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두 선수가 이후 앙숙이 된 것은 당연지사.


▶ 이제는 새로운 역사를 향해...

많은 사건과 사고, 그리고 기념비적인 기록들을 뒤로한 채 양키스타디움은 기억 저편으로 물러난다. 86년의 역사를 지닌 야구장의 퇴장은 이제 27년의 역사를 지닌 한국 프로야구로서는 다소 상상하기 힘들다. 게다가 메이저리그에는 여전히 양키스타디움 이상으로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구장인 펜웨이파크(1912년 개장)와 시카고 컵스의 홈구장인 리글리필드(1914년 개장)가 여전히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2008년의 양키스는 사실상 포스트시즌 진출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양키스가 남은 6경기에서 모두 승리하고 보스턴이 7경기를 모두 패해야만 진출이 가능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홈구장의 마지막 경기에서 탈락이 확정되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다.


양키스타디움의 모든 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기존 구장에서 사용되던 몇몇 시설 중 기념관 일부는 고스란히 새로운 구장으로 옮겨져서 재활용된다. 지난 추억까지도 그대로 가지고 가겠다는 그들의 의지다.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지만 그것은 과거의 단절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양키스타디움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면서 문득 든 생각은 ‘부럽다’라는 것이었다. 한 구장이 근 한 세기에 가깝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과, 그 기억을 공유하는 레전드들과 팬들이 함께 마지막을 축하해줄 수 있다는 것. 언젠가 시간이 좀 더 지나면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저와 같은 모습을 볼 수 있게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 김홍석(http://mlbspecia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