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이져의 야구 칼럼/MLB Stories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서 - 필더 & 그윈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5. 30.

  90년대 메이져리그 최고의 타자라면 아메리칸 리그에서는 켄 그리피 주니어, 내셔널 리그에서는 배리 본즈를 꼽을 수 있다. 5툴 플레이어로서 공수에 모두 능한 최고의 슈퍼스타라는 점 외에도 이 둘은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둘의 아버지 역시도 유명한 빅리거였다는 것이다.


  전설적인 선수들인 피트 로즈, 자니 벤치와 함께 빅 레드 머신이라는 멋들어진 별명의 최강 타선을 구축했던 교타자 켄 그리피, 통산 332홈런 461도루를 기록한 호타준족의 대명사 중 한명인 바비 본즈가 바로 그들이다. 그리피 주니어와 배리가 각각 신시네티와 샌프란시스코로 이적한 것도 한결같이 ‘아버지의 팀에서 뛰고 싶다’ 라는 이유에서였다.


  게다가 그들은 아버지보다 훨씬 더 뛰어난 선수로 성장해 메이져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이 되어버렸다. 아버지가 가지지 못했던 파워까지 갖추고서 4번의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하고, 한때 아론의 통산 최다홈런 기록을 깰 선두주자로 기대를 모았던 그리피. 아담 던이 깨기 전까지 단일 시즌 최다 삼진(189개) 기록을 보유하고 있던 주인공답게 컨택 능력이 떨어지고 1:2에 가까운 볼넷:삼진 비율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 바비와 달리, 물려받은 파워-스피드 외에도 극강의 선구안과 정교함까지 갖춘 배리.


  명예의 전당에 오를만한 선수는 아니었지만 분명 이름 난 선수임에는 틀림없었던 아버지들, 그리고 (본즈가 약물 문제로 명예의 전당에 오르던 말든) 이미 메이져리그 역사책을 만든다면 그 중 한 페이지를 자신의 이야기로 가득 채울 선수들이 되어버린 아들들.
빅리그에 많은 부자 선수나 형제 선수, 심지어 3대째 선수 생활을 한 선수들이 많지만, 이들 두 부자만큼 대단한 기록을 남기고 사랑받은 가족은 없었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럴 뿐이지, 사실 생각 보다 많은 부자나 형제 관계의 선수들이 존재하는 메이져리그에서는 매년 드래프트 시기가 되면 실력과 별개로 주목받는 이들이 있다. 운동 신경은 유전되기 때문인지 현역이나 은퇴한 선수들의 아들이 또 다시 야구 선수로 성장해, 드래프트에 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3년 전에는 로져 클레멘스의 아들이 포수로 휴스턴에 지명되어, 팬들로 하여금 부자 배터리의 탄생을 기대하게 하기도 했다)


  2002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이제 은퇴한지 4년밖에 되지 않아 여전히 모두의 기억 속에서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으로 기억되던 세실 필더의 아들이 드래프트에 참가한 것이다. 그것도 아버지와 같은 포지션으로. 애틀란타가 단장의 아들을, 다져스가 감독의 아들을 지명해서 또한 화제가 되었던 이 드래프트에서 7순위의 밀워키는 1라운더로 프린스 필더를 지명한다.


  다음해 또 다시 재미있는 일이 생긴다. 이번에는 영원한 타격왕 토니 그윈의 아들이 드래프트에 참가한 것이다. 아들인 앤써니 그윈 주니어(나중에 아버지처럼 ‘토니 그윈’으로 바꿈) 역시 포지션은 외야. 그리고 이번에도 밀워키가 2라운드에서 전체 39순위로 이 친구를 지명하게 된다.


  메이져리그 올드팬이라면 강인한 인상으로 남아 있을 세실 필더와 토니 그윈, 이들의 발자취는 켄 그리피 시니어나 바비 본즈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한 수 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요즘 데이빗 오티즈의 도루 이후 팀 동료들과 팬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는 장면이 가끔 하이라이트 장면에 등장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혹시 이 장면의 원조가 누군지 아는가? 예전의 하이라이트 필름을 보면 디트로이트 유니폼을 입고 있는 한 뚱뚱한 선수가 도루에 성공한 후 관중들의 기립 박수를 받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이 선수가 바로 세실 필더다. 통산 2개밖에 되지 않는 도루를 성공시킨 것이니 관중들이 얼마나 즐거웠을까.


  빅리거로서의 출발이 그다지 신통치 않았던 세실 필더는, 89년 일본에서 뛰고 돌아온 뒤 갑자기 타격에 눈을 뜨며, 90년 51홈런 132타점으로 리그 홈런-타점 타이틀을 차지하고 리그 MVP 투표에서 2위에 오른다. 이 51홈런은 로져 매리스 이후 아메리칸 리그에서 30년 만의 최다 홈런 기록이었고, 이 후 3년 연속으로 타점왕에 오른 필더는 베이브 루스, 타이 캅, 호너스 와그너, 로져스 혼스비 등과 함께 3년 연속 타점왕에 오른 7인 중 한명이 된다. 319홈런 1008타점이라는 당장 눈에 보이는 통산 성적보다도 더 큰 임팩트를 주며 리그를 주름잡았던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 중 한명이었다.


  올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토니 그윈이야 따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20년 동안 오직 샌디에고 파드리스의 프랜차이져 스타로 뛰며, 3000안타를 달성하고 통산 .338의 타율로 8번의 타격왕과 7번의 최다안타 1위, 5번의 골드 글러브와 7번의 실버 슬러거 수상 기록을 가지고 있는 그윈. 무엇보다 20년의 선수생활 동안 10,000번이 넘게 들어선 타석에서 당한 삼진 개수가 겨우 434개(!!) 라는 것이 그의 위대함을 가장 잘 설명해 준다.


  바로 이들의 아들들이 지명된 것이다. 그리고 마이너를 거치고 메이져리그에 올라온 아들들은 올시즌 팀 동료들과 함께 밀워키의 돌풍의 주역이 되고 있다.
그리피-본즈 부자에 견줄만한 명가 탄생을 예고하며 그들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같은 팀에서 함께 뛰면서.


  프린스는 02시즌 지명 된 이후 41경기 만에 10홈런 40타점 타율 .390 출루율 .531의 엄청난 성적으로 루키리그를 초토화 시키고 바로 싱글 A로 승격된다. 03시즌 싱글 A에서 137경기 동안 27홈런 112타점 .313-.409-.526의 빼어난 성적으로 리그 MVP에 선정되었다. 04시즌은 더블 A, 05시즌은 트리플 A에서 시작하며 착실히 단계를 밟아왔고, 트리플에서 28홈런 86타점(103경기)을 기록하며 빅리그로 승격된다.


  비록 ROY는 놓쳤지만 자신의 첫 풀타임 시즌을 성공적(28홈런 81타점)으로 장식한 그는 올시즌 팀 동료 JJ 하디와 함께 홈런 레이스를 주도하더니, 현재 16홈런으로 내셔널리그 단독 선두에 올라 있을 만큼 뛰어난 성적을 보이고 있다. 루키-싱글 A-트리플 A 올스타에 뽑혔던 프린스가 올해는 메이져리그 올스타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그윈의 출발은 그리 신통치 않았다. 03~05시즌까지 싱글과 더블 A에서 2할대 중반의 그저 그런 타율은 보인다. 덕분에 중간에 여러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지만, 트리플 A에서 시작한 06시즌에 드디어 3할 타율(112게임 30도루)을 기록하며 빅리그로 콜업 되었다.


  올시즌은 백업 외야수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절정의 타격감을 자랑하며 최근에는 점점 출장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이미 빌 홀과 제프 젠킨스가 한자리씩을 차지한 상황에서, 케빈 멘치, 코리 하트 등과 함께 마지막 한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고 있지만 결국에는 그윈이 최종 승자가 되지 않을까 싶다.(현재 타율 .324 6도루)


  6연패를 하는 등 최근 10게임에서 2승 8패로 잠시 주춤하고 있지만, 밀워키는 이제 꼼꼼히 뜯어봐도 충분히 강팀이다. 시즌 전부터 이미 예고되었던 돌풍이고, 유망주들의 성장으로 인해 나타나는 시너지 효과는 실로 대단한 수준이다. 이러한 팀 성적을 바탕으로 어느새 프린스 필더는 리그 MVP에 도전하고 있고, 그윈은 신인왕에 도전하고 있다. 쉽지는 않겠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프린스 필더와 토니 그윈 주니어, 과연 이들이 아버지를 뛰어 넘는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을까? 한명은 이미 보여주기 시작했고, 다른 한명은 이제 시작이다. 프린스는 아버지가 2위만 두 번 기록하며 결국 수상하지 못했던 MVP에 대한 꿈을 이루는 것이, 그윈의 경우는 아버지의 벽이 너무 높긴 하지만, 그윈 시니어가 그토록 바랬던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는 것이, 아버지의 명성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올시즌 밀워키의 돌풍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롭지만 이러한 요소가 더해져 있기에 더욱 보는 재미가 있다. 아들의 활약을 지켜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을 세실 필더와 그윈 시니어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필자 역시도 기억하는 것은 선수 생활 말년에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뚱보 세실 필더의 모습과, 몸이 불어서 전성기의 날렵한 몸놀림을 상실한 토니 그윈의 모습뿐이다. 프린스와 그윈 주니어의 모습에서 홈런왕 세실 필더와 타격왕 토니 그윈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것은 혼자만이 감상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