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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져의 야구 칼럼/MLB Stories

메이저리거에게 WBC는 이벤트에 불과하다?

by 카이져 김홍석 2009. 3. 18.

사실 WBC는 공식적인 국가대항 세계대회가 아니다. 실제로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각국의 대표팀을 초청하여 벌이는 일종의 이벤트전의 성격이 강하다.

지난 대회에서 미국 대표팀으로 뛰었던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이번에는 도미니카 공화국 대표로 출장할 뻔 했던 것에서도 그런 면이 잘 드러난다. 선수 구성에 관한 원칙 자체가, 국제 스포츠에서 기본적으로 통용되는 규칙과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대회에 출장하는 선수들의 유니폼에는 각국의 국기가 수놓아져 있다. 일단 대표로 뽑힌 이상, 선수들의 어깨에는 해당 국가 국민들의 기대와 염원이 걸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수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책임감과 더불어 승리를 향한 강한 의지가 요구된다.

한국과 일본의 1조 승자전이 있었던 18일(이하 한국시간)에는 그에 앞서 미국과 푸에르토리코의 본선 2조 최종진출전 시합이 벌어졌었다. 승리한 팀은 4강에 진출하게 되고, 패한 팀은 탈락하게 되는 매우 중요한 시합이었다.

양 팀 모두 어떻게든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중요한 경기. 하지만 그 시합에서, 적어도 한국과 일본의 선수나 국민이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연출되어 경기를 지켜보는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4-3으로 푸에르토리코가 근소한 차이로 앞서 있던 7회말 미국 공격, 지미 롤린스의 외야 플라이 때 2루에 나가 있던 쉐인 빅토리노가 우익수 알렉스 리오스의 송구 에러로 3루까지 진루했다. 사실 리오스의 에러라고 볼 수는 없었다. 루상에 붙어 있던 빅토리노가 리오스의 송구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교묘하게 부딪히며 궤도를 바꿔놓은 결과였기 때문이다.

푸에르토리코의 감독까지 나와서 항의를 하긴 했지만, 애당초 송구 방향이 2루에 서 있는 빅토리노를 향해 정확하게 날아왔기 때문에 고의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진루가 인정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빅토리노의 센스(?) 넘치는 행위를 페어플레이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남는다.

문제는 그 후 푸에르토리코 선수들의 반응이었다. 2아웃이긴 했지만, 동점주자가 3루까지 나갔다. 여차하면 동점이고, 다음 타석에 들어선 선수가 앞선 타석에서 홈런을 쳤던 케빈 유킬리스임을 감안하면 단숨에 역전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트릭 플레이에 당한 2루수 펠리페 로페즈는 빅토리노를 가리키며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유격수 마이크 어빌레스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메이저리거인 빅토리노와 농담을 주고받는 그들의 표정에서는 그 어떠한 분함이나 경기에 대한 절박함도 느낄 수 없었다.

국가대표팀 간의 맞대결, 그것도 진출이냐 탈락이냐가 걸려 있는 중요한 시합에서 드러난 모습치고는 무척이나 위화감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비슷한 장면은 9회에 또다시 반복됐다. 여전히 점수는 4-3으로 미국이 지고 있던 상황에서 9회초 푸에르토리코의 마지막 공격. 미국은 투수와 내야진이 갑자기 흔들리면서 추가점을 허락하고 말았다. 한 번의 공격만 남겨 놓고 있는 상황에서 1점과 2점의 차이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2루수 브라이언 로버츠는 추가 타점을 기록한 라몬 바즈케즈가 2루로 들어오자 엉덩이를 두들겨주며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물론 그 표정에는 반가움을 표시하는 웃음이 가득했다. 또 한 번의 위화감이 드는 장면이었다.

물론 미국과 메이저리그의 정서는 동양과는 다르다. 실제로 메이저리그 경기를 보다보면 이러한 장면을 꽤나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팀의 한 시즌 농사가 걸려 있는 포스트시즌에서는 아니다. 양 팀 모두 여유가 있는 경기 초반이라면 모를까, 승패가 걸려 있는 경기 후반에는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미국과 푸에르토리코의 시합은 마치 올스타전을 보는 듯했다. 최선을 다한 플레이를 펼치기는 하지만, 그런 선수들에게서 승리에 대한 목마름은 느껴지지 않았다. 승리가 최종 목표라면 분함을 느껴야 할 상황임에도 그들은 웃고 있었다. 패배가 눈앞에 닥쳐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경기는 9회말 미국의 드라마 같은 역전승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대로 졌다고 하더라도 특별히 크게 상심하거나 분해하는 모습을 보기는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이상하게도 WBC에서는 삼진을 당했다고 방망이를 부러뜨리는 선수도, 투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벤치에 들어가서 불통을 걷어차며 분을 삭이는 선수를 보기가 어렵다. 메이저리그 정규시즌에서는 그토록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인데도 말이다.

과연 메이저리거들은 이번 대회에 무슨 목적을 가지고 참가한 것일까. 단순히 이벤트전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거액의 연봉을 받는 그들에게는 이번 대회의 상금이 너무 적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국과 푸에르토리코의 경기는 지면 탈락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시합은 져도 또 다른 기회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전자는 올스타전 같았고, 후자는 생사대적이라도 만난 듯한 치열함이 느껴졌다.

같은 날 벌어진 두 시합에서의 느껴지는 전혀 다른 느낌. 이것이 이번 WBC를 지켜보는 내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 김홍석(http://yagoo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