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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의 꽃 보다 야구

'노히트노런'의 추억, 김태원을 만나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5. 6.

어지간한 LG 트윈스 팬들이라면 1990년, 1994년 우승을 모두 경험했던 에이스 김태원을 기억할 것이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언한 이후 LG 트윈스 투수코치, KIA 타이거즈 투수코치를 역임했던 김태원은 이후 프로야구판을 떠나 고교야구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많은 유망주들을 프로에 보내며 ‘아마야구 투수 조련사’로 새로이 태어났다.

광주 동성고에 이어 대구 상원고로 적을 옮긴 김태원 코치는 여전히 ‘유망주 조련사’다운 모습을 과시했다. 그리고 그는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을 격려하며 소속팀의 연승을 이끌기도 했다. ‘노히트 노런 투수’로 더 유명했던 김태원 코치를 대통령배 전국 고교야구 선수권대회가 한창이었던 목동구장 덕아웃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Part 1. 현역시절

Q :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먼저 ‘선수 김태원’을 기억하고 있는 야구 팬 여러분들게 한 말씀 해 주십시오.

김태원 코치(이하 ‘김’으로 표기) : 제가 프로야구 LG 트윈스 지도자를 거쳐 KIA 타이거즈 코치를 역임했고, 이후에는 아마추어 야구를 지도했는데, 제가 어디에 있건 간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 주셔서 팬 여러분들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프로와 아마를 떠나 야구는 팬들을 위한 스포츠입니다. 그래서 저의 야구 유니폼에 새겨진 이름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팬들이 지켜보시니까요. 어쨌든 야구 유니폼을 오래 입을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Q : 1993년 9월 9일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실 것 같습니다. 당시 쌍방울 레이더스를 상대로 9-0으로 이긴 경기는 저 역시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 : 당시 기록했던 노히트 노런(프로 통산 8번째)이 제 자신의 기록으로 남았지만, 사실은 팀 동료들의 도움이 대단히 컸습니다. 그 날 경기에서 병살타가 3개 나왔고, 호수비도 2개나 나와 동료들이 제 어깨를 가볍게 해 주었습니다. 지금은 미네소타 트윈스 극동 스카우터를 하고 있지만, 당시 2루수였던 김태민 선수도 결정적인 아웃 카운트를 잡아주었던 기억도 납니다. 참으로 감회가 새롭네요(웃음).

Q : 현역시절 최고의 순간을 뽑아주신다면요?

김 : 1990년도에 우승했을 때였습니다. 당시 제가 코리언시리즈 2차전에 선발 출장했는데, 승패를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10회 연장 끝에 밀어내기 볼넷으로 3-2 승리를 거두었던 순간이 생생합니다. 당시 제가 9회까지 던지고 물러났거든요. 이 경기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전승 우승도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당시 백인천 감독님을 최근에 대구에서 뵌 적이 있었는데,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웃음).

Q : 은퇴 시점이 다소 아쉬웠습니다(34세).

김 : 1999년 시즌을 앞두고 구단에서 코치직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유학을 조건으로 한 것이었지요. 그래서 코치직을 수락했습니다. 주니치 드래곤스를 시작으로 LA 다저스에도 다녀왔습니다. 이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조건이었기 때문에 은퇴도 쉽게 결정했습니다.

물론 은퇴 결정 이후 아쉬움이 조금도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아쉬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노력했고, 은퇴 이후 바로 (그러한 미련을) 잊었습니다.

▲ 대통령배 결승전에서 박화랑(37번)-김정수(10번), 두 에이스들을 점검하는 김태원 코치. 기교파인 박화랑과 파워피처인 김정수는 서로 다른 피칭 스타일을 선보이고 있지만, 이 둘 모두가 김태원 코치의 작품이다.

Part 2. 호남에서 영남까지

Q : 은퇴 직후 치킨집에서부터 시작해서 주유소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으셨습니다.

김 : 원래 저희 집안이 자영업에 종사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자영업에 미련이 잇었지요. 그런데 잘 안 되더군요(웃음). 역시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라운드로 돌아 온 것이고요.

Q : 서울을 떠나 본 적이 없던 김태원 코치님께는 광주라는 도시가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본 광주’, 어떠한 곳이었습니까?

김 : 말 그대로 ‘야구의 명가’지요. 선수들이 호흡을 맞춰 야구하는 모습에서 기력이 강하고, 정신력 또한 강한 곳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야구 선배들이 조언을 아끼지 않는 모습이라든지, 지침을 주는 체계가 잘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광주 동성고등학교에는 성균관대학교 선배셨던 윤여국 감독님도 계셨고, 광주에도 아는 지인들이 많아 전혀 낮설지만은 않은 도시였습니다.

Q : 동성고 한기주, 양현종 등은 모두 김 코치님의 작품이었습니다.

김 : 독하게 훈련시킨 결과였지요(웃음). 투수들이 제구력을 잘 잡기 위해서는 하체 밸런스가 잘 잡혀 있어야만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훈련을 많이 시켰지요. 또한 선수들의 장/단점을 파악하여 ‘놀면서, 즐기면서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제자들을 가르친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박화랑-김정수 두 투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Q : 광주를 거쳐 이번에는 대구에 자리 잡으셨습니다.

김 : 대구로 내려 온 동기는 대구 상원고 전신인 대구상고 야구 선배들과 기라성같은 선배님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히어로즈 감독이신 김시진 감독님을 포함하여 SK 이만수 코치님, 삼성 김용국 코치님 등이 모두 대구상고 출신입니다. 저는 선배님들께서 후배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고, 또 학교를 위해 많은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상원고등학교에 온 것입니다. 그리고 박영진 감독님께서 성균관대학교 4년 선배셨기에 그 인연으로 대구에 내려 온 것이기도 합니다. 저희 두 사람이 영/호남을 같이 돌고 있는 셈이지요(웃음).

Q :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야구를 하는 현역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십시오.

김 : 유니폼을 입고 있는 이상, 은퇴할 때까지 최선을 다 하여 선수 생활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꾸준한 훈련도 필요하겠지만, 야구를 ‘좋아서’하는 후배들과 제자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 김태원은 누구?
우신고교-배제고교(고3때 전학)-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1986년도에 MBC 청룡 유니폼을 입었던 우완 정통파 투수였다. 당시 33경기에서 평균자책 2.86, 2승 6패 3세이브를 기록하며 두각을 나타내었던 김태원은 김동엽 감독(작고)이 ‘MBC의 우승을 자신한다’고 호언장담할 수 있었던 기둥투수이기도 했다.

그랬던 김태원이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것은 LG 트윈스가 첫 우승을 차지했던 1990년도였다. 평균자책 2.51, 18승 5패라는 빼어난 성적으로 팀 우승에 단단히 한 몫 했던 김태원은 이후 1994년에 LG가 다시 한국시리즈 타이틀을 차지할 때에도 마운드 필두에 있었다. 바로 전년도인 1993년 9월 9일(對 쌍방울전)에는 프로 통산 8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4년 이후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던 김태원은 1996년에 다시 한 번 3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며 부활하는 듯 보였지만, 1998년이 사실상 선수 생활의 마지막이었다. 이후 1999 시즌을 앞두고 은퇴를 선언한 김태원은 해외 연수 이후 LG 트윈스 투수 코치, KIA 타이거즈 투수 코치를 거쳐 광주 동성고 코치를 역임했다. 이 시절 키워냈던 ‘김태원의 작품’이 바로 한기주와 양현종이다.

광주 동성고 코치직 수행 이후 다시 대구 상원고등학교로 적을 옮긴 김태원 코치는 수석 코치로서 대통령배 준우승을 일궈냈다. 감투상을 수상한 박화랑, 팀의 에이스 김정수 등도 모두 김 코치의 작품이다.

// 유진(http://mlbspecia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