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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타임스 필진 칼럼

코리안특급 박찬호의 '결정적 순간들'

by 카이져 김홍석 2010. 12. 25.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보낸 17년은 그야말로파란만장이라는 한마디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영광과 좌절의 시기가 극명하게 교차하는 박찬호의 야구인생은 그 자체로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무수한 사연과 곡절, 그 속에서 최고의 야구인으로 성장해온 박찬호의 이야기는 마치 살아있는 인생교본과도 같다.

 

1996 4 7일 메이저리그 첫 승

 

풀타임 메이저리거 첫해, 94년에 다저스에 입단했지만 이후 2년간 마이너리그를 전전해야 했던 박찬호는 1996년 불펜투수로 전격적인 메이저리그 승격을 통보 받았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4 7일 시카고 컵스와의 원정경기. 선발 라몬 마르티네스의 급작스런 부상으로 기회를 잡은 박찬호는 2회부터 등판해 4이닝 7탈삼진 무실점 호투로 빅리그 데뷔 첫 승을 따냈다.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거의 사상 첫 승, 한국야구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모 일간지에는 박찬호의 첫 승을 1면 특집으로 보도하며월드컵 첫 승에 맞먹는 감격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 태권남아 박찬호?

 

흔히 박찬호의 전성기는 풀타임 선발투수로 처음 등장한 97년부터 다저스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1년까지로 기억되지만, 이 사이에 끼어있는 1999년은 박찬호에게 있어서 시련의 시간이었다. 방콕 아시안게임 차출로 오프시즌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한 박찬호는 슬럼프에 빠지며 고전했다.

 

특히 이 시즌에는 박찬호의 야구인생에 유독 논란이 되는 장면들이 대거 등장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6 6일 애너하임 에이절스 전에서 벌어진 팀 벨처와의 난투극 파문이었다. 타자로 나선 박찬호는 경기 중 벨처의 인종차별적 언사에 분개하여 그대로두발당상을 날렸는데, 아쉽게도(?) 발차기가 빗나가며 밑에 깔려서 하마터면 그대로 시즌아웃 될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박찬호는 훗날 그때를 회상하며내가 아니라 마치 한국을 욕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떠올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장면은 지금도 메이저리그 역대 난투극을 꼽을 때 종종 거론될 정도로 두고두고 좋지 않은 이미지를 남겼다. 이전까지 겸손한 이미지의 박찬호였지만, 난투극에서 불문율로 여겨지는 금기시된 발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과잉대응이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박찬호는 이에 대해서나는 어려서부터 태권도를 배운 것이 몸에 베어있었을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벨쳐는그럼 나는 사격을 배웠는데 총으로 쏴도 되는 것이냐고 응수하기도 했다. 이래저래 발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는 씁쓸한 교훈을 남긴 하루였다.

 

● 위대한 홈런 뒤엔 항상 그가 있었다?

 

박찬호하면 유독 홈런과의 악연을 빼놓을 수 없다. 박찬호는 17시즌 동안 통산 230개의 홈런을 허용했는데, 그 중에는 특히 기억에 남는 홈런들이 많았다. 박찬호 인생 최악의 경기로 평가 받는 1999 4 24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전에서는 페르난도 타티스에게 한 이닝 연타석 만루홈런(속칭한만두’)을 허용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2001년에는 메이저리그사에 영원히 남을 홈런기록의 주인공이 되었다. 배리 본즈(당시 샌프란시스코)의 기록적인 홈런 행진이 이어지던 당시 본즈에게 71호와 72호 홈런을 잇달아 맞은 주인공이 바로 박찬호였다. 같은 해 생애 처음으로 밟은 올스타전에서는 은퇴를 앞둔 철인칼 립켄 주니어에게 선제 홈런을 내주며 패전투수가 되기도 했다. 굴욕이라면 굴욕일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상대를 피하지고 않고 당당히 정면승부를 펼친 박찬호의 승부근성을 평가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 박찬호의화려했던 시절

 

박찬호가 전성기 시절 누렸던 인기와 지명도는 지금의 상상을 초월한다. 박찬호의 야구인생에서 최정점을 찍은 시기는 다저스에서 보낸 마지막 2000~2001시즌의 2년간이다. 이 기간 동안 박찬호는 무려 33승을 수확하며 명실상부한 리그 최정상급 투수로 군림했다.

 

2000년에는 18승 평균자책점 3.27, 탈삼진 217개로 사이영상 후보로 거론되었고, 2001년에는 전반기 15경기 연속 퀄리스타트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신기록에 도전하기도 했다. 그해 FA가 되어 5년간 6500만 달러라는 초대박 계약을 맺으며 마침내천만장자대열에 올라섰다. 차범근 이후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스포츠 영웅으로 자리매김한박찬호 효과로 인하여 전국이 들썩이던 시절이었다.

 

● 태극전사 박찬호

 

비록 경력은 길지 않지만 박찬호는 대표팀에서도 중요한 국제대회마다 인상적인 족적을 남겼다. 97~98 2년 연속 팀 내 최다승을 거두며 메이저리그 정상급 선발투수로 자리잡아가던 박찬호에게 풀지 못한 숙제는 바로 병역문제였다. 때마침 프로선수들의 출전이 허용된 98년 방콕 아시안게임은 박찬호에게 있어서 합법적으로 병역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한국야구 최초의 드림팀으로 기억되는 방콕 대표팀에서 박찬호는 당당히 에이스 역할을 수행했고, 일본과의 결승전에서는 7회 완투로 콜드게임 승을 따내며 마침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6년에는 WBC에 출전하여 예선에서는 마무리로, 토너먼트에서는 선발투수로 변신하며 빛나는 역투로 한국의 4강행을 이끌었다. 이 대회에서 박찬호의 자책점은 ‘0.00’이었다. 일본과의 아시아지역 최종전에서 9회 마무리로 등판하여 일본의 자존심 스즈키 이치로를 범타처리하며 승리를 확정 짓던 장면은 최고의 하이라이트였다.

 

마지막 태극마크였던 2007년에는 베이징올림픽 최종예선 대표팀에서 주장을 맡았고, 대만전에서 역투를 펼치며 승리에 공헌했다. 2009년에는 제2 WBC 출전을 앞두고 메이저리그 재도전을 위하여 대표팀의 러브콜을 고사해야 했고, 대표팀 은퇴 기자회견에서는 눈물까지 보여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 전성기와 맞바꾼 FA? 세 번의 실수

 

산전수전 다 겪은 박찬호지만 항상 옳은 길만은 걸어왔던 것은 아니다. 인생의 분기점에서 한두 번의 잘못된 선택만 아니었다면 박찬호의 전성기가 조금은 더 길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탄탄대로를 걷던 박찬호의 야구인생을 뒤바꾼 것은 LA 다저스를 떠나면서부터 시작됐다. 박찬호는 여기서 세 번의 잘못된 선택을 했다. 첫째, 2000년 당시 다저스는 4년간 4000만 달러를 제시하며 박찬호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계약 성사를 눈앞에 두고 박찬호의 거부로 불발되었다. 혈기왕성하던 시절의 박찬호이기에 가능한 호기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쉬움이 남는 욕심이었다.

 

둘째는 2001년에 FA를 의식하며 부상을 참고 무리하게 등판을 강행하다가 오히려 허리부상이 악화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 이것이 이후 텍사스에서 박찬호가 극심한 슬럼프에 빠지는 비극의 단초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박찬호는 2001년 슈퍼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와 손을 잡고 텍사스 레인저스와 5 6500만 달러의 대박 계약을 터트렸지만, 아메리칸리그판 쿠어스필드로 불리는 타지친화적 구장 알링턴 볼파크와 텍사스의 살인적 무더위를 과소평가한 것이 세 번째 실수였다.

 

● 마침내 1인자로, 박찬호의 느리게 걷기

 

박찬호는 2008년부터 불펜투수로 재기하며 제2의 야구인생을 개척했다. 선발투수시절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세월의 경험이 주는 연륜은 박찬호를 성숙한 베테랑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리고 박찬호의 야구경력에서 정점을 찍은 대기록은동양인 투수 최다승이다.

 

2010 10 2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선라이프 스타디움에서 열린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원정경기, 3-1로 앞선 5회말 구원투수로 등판한 박찬호는 3이닝을 6탈삼진 무실점으로 완벽하게 틀어막는 호투로 그 경기의 승리투수가 됐다. 개인 통산 124(98). 은퇴한 노모 히데오(123, 2008년 은퇴)가 세운 아시아 출신 투수 메이저리그 역대 최다승 신기록의 주인공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대기록의 달성은 박찬호가 미련 없이 빅리그 생활을 명예롭게 마무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 구사일생 이준목[사진=홍순국의 순 스포츠, S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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