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8일. 넥센과의 주중 3연전의 첫 경기. 당시 두산은 페르난도를 선발로 꺼내들어 승리를 거뒀던 바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려 네 명의 투수가 홀드를 챙겼다. 5이닝을 3실점으로 틀어막고 마운드를 이현승에게 넘겨준 페르난도, 그리고 뒤이어 등판한 이현승의 난조로 마운드에 올라온 고창성을 시작으로 노경은, 이혜천, 정재훈까지. 개인적으로 근 몇 년간 두산의 야구를 봐오면서 이런식의 불펜 운용은 본 기억이 없다.
대게 두산의 불펜 운용이라 한다면 마무리 투수 포함 약 세 명 가량의 필승조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간 두산의 선발진의 이닝이팅 능력이 굉장히 저조한 수준이었다는 데에 있다. 결국 그 부담은 고스란히 필승조에게 넘어가게 되고 필승조에 포함된 투수가 한 경기에서 2이닝 이상 던지는 장면은 빈번하게 나타났다.
만약 예전의 두산이었더라면 위와 같은 상황에서 고창성에서 2이닝 가량을 던지게 했을 것이다. 선발이 많은 이닝을 책임져주지 못했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두산은 이혜천을 좌타자를 상대로한 원포인트로 활용하는 등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수를 이용했고 결국 경기를 승리로 장식했다. 그동안의 두산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참으로 생소하기 짝이없는 마운드 운용으로 일궈낸 승리였다.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이것만 놓고 평가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간 김광수 대행이 보여준 불펜 운용은 한마디로 기가막혔다. 비록 투수출신은 아닐지라도 경기의 흐름을 읽는 능력 면에서 만큼은 그 어느 감독에 견줘도 부족함이 없는 감독이라는 것이다.
전 감독이었던 김경문 감독은 좌완 이혜천을 선발자원으로 낙점했다. 그 후 이혜천이 선발로써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그를 불펜으로 내리고 또다시 좌완 이현승을 선발로 기용했다. 김 전 감독은 이렇듯 로테이션에 좌완이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물론 실행에 옮겨진 적은 사실상 없었다.) 하지만 이전에도 꾸준히 이야기했었지만 로테이션에 꼭 좌완이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불펜 쪽에 좌완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마운드 운용에는 더욱 효율적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로 SK는 불펜진에 풍부한 좌완 계투요원들을 보유한 탓에 선발진에 무리하게 좌완을 포함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용병 인선에서도 나타나는데 실제로 SK는 09시즌 선발했던 니코스키를 끝으로 용병 투수는 우완만을 데려오고 있다.(카도쿠라-글로버-매그레인-고든) 불펜에 의존도가 기형적으로 높은 우리 야구에서는 좌완 선발 한 두명 보유하는 것 보다 불펜에 좌완을 배치해 적재적소해 투입하는 것이 훨씬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두산은 이러한 야구를 할 수 없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왼손으로 던지는 선수 중 제대로 된 선수가 없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이혜천이 국내 입단 당시 그를 불펜으로 활용하길 바랐다. 물론 많은 팬들이 그의 몸값을 예로 들며 불펜으로 전향하기에는 너무 비싼 선수라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하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불펜 합류가 팀 전력을 완전체로 만들 수 있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라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이혜천은 짧게 짧게 던지지만 상대팀 좌타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주고 있다. 6월부터 9일 현재까지의 이혜천의 성적은 상당하다. 시즌 평균자책점은 6.34에 달하지만 이 기간동안 이혜천은 8⅓이닝을 던지는 동안 3.24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올 시즌 좌타자를 상대로 한 이혜천의 피안타율은 0.224에 불과하다. 선발로써는 그저그랬지만 불펜으로 전향한 이혜천은 당장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좌완 계투요원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혜천 만큼은 아니지만 이현승 역시 누수가 심한 불펜진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비록 6월 한 달간 평균자책점은 7.56으로 그리 좋지 못했으나 이미 불펜으로 5월 달에 호성적을 거뒀던 바, 일시적인 부진으로 여겨진다.(5월 평균자책점 2.38)
이혜천과 이현승이라는 수준급의 좌완이 동시에 두명씩이나 불펜에 합류하게 되면서 두산의 불펜은 이전과 달리 상대로 하여금 대응하기 쉽지 않도록 만들어 버렸다. 이전까지 두산의 마운드 운용은 그야말로 천편일률적이었다. 패전처리, 추격조, 필승조가 명확하게 분류되어있었다. 심지어 이러한 마운드 운용은 시즌 초부터 말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거기다 다양성 조차 실종되어 상대에게 마운드의 수를 읽히기 일쑤였다.
하지만 김광수 대행체제가 들어서면서부터 이러한 방식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패전처리는 몰라도 추격조와 필승조의 사이에 존재하던 장벽을 자연스레 허물면서 불펜의 다양성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 결과 김 대행이 꺼내드는 불펜 카드는 꺼내드는 카드마다 ‘신의 한수’가 되어 기가막히게 먹혀들고 있다.
한 때 두산의 부진과 맞물려 잠시나마 리그가 상, 하위로 구분되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예전과는 다른 방식의 불펜 운용으로 상위권 진입을 노리는 두산이 다시금 불을 지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