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병용이 던진 몸에 맞는 공이 고의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억울하다면 13연패가 눈앞에 다가온 롯데가 억울했지, 크게 이기고 있던 SK가 악의를 가질 이유는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잠깐의 방심이 부른 아쉬운 사건이었다.
하지만 진짜 사건은 이어진 8회말 박재홍의 타석 때 벌어졌다. 김일엽은 초구를 몸 쪽으로 바싹 붙여 던졌다. 만약 박재홍이 맞기라도 했다면 또 한 번의 큰 일이 날 수도 있었던 상황. 격분한 박재홍은 마운드를 향했고, 결국 양 팀 벤치에서 선수들이 뛰쳐나오며 험악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김일엽의 투구는 고의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렇잖아도 팀이 SK를 상대로 13연패를 당하기 직전 상황까지 몰렸는데, 팀의 주장이 얼굴에 공을 맞았으니 화가 날만도 하다.
어쩌면 그것은 로이스터 감독이 직접 지시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능성’ 차원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메이저리그 출신인 로이스터 감독이라면 보복성 빈볼에 이어지는 벤치 클리어링까지 염두에 두고 지시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메이저리그였에서는 이와 같은 보복성 빈볼은 매우 ‘상식적’인 일이다. 선수의 안전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선수들의 안전을 너무나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생긴 관행이다.
메이저리그는 1920년 라이브볼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레이 채프먼이라는 한 선수가 빈볼에 맞아 사망한 사건을 겪은 적이 있다. 그 후로 선수들의 머리를 향해 날아가는 공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 누가 되었건 자신이 소속 팀의 타자가 머리 혹은 그 근처로 날아오는 공 때문에 크게 다칠 뻔 했다면, 무조건 상대팀의 NO.1 타자에게 빈볼이 날아간다. 우리 팀 선수가 당한 정도에 따라 부위는 조금씩 달라지지만, 여차하면 머리를 향해 99마일짜리 포심이 날아들기도 한다. 실수로라도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는 뜻에서다.(물론 ‘한 번 더 그런 짓을 하면 죽여버리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
조성환이 맞은 부위와 부상 정도를 감안했을 때, 김일엽의 투구가 박재홍의 머리를 향하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다행스러울 정도다. 저 유명한 페드로 마르티네즈나 랜디 존슨이었다면 정확한 컨트롤로 일말의 망설임 없이 타자의 머리를 노렸을 것이다.(물론 타겟이 되는 타자들도 어느 정도는 각오를 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다 피하긴 한다. 난투극이 벌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재작년에도 SK와 관련된 빈볼 시비가 끊이지 않으며 야구판이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작년에는 윤길현이 수많은 국내 야구팬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었다. 이상하게 SK 주변에서는 빈볼과 관련된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은퇴한 선수들의 후일담에서도 간간히 드러나는 것처럼, 국내 야구에서는 감독이 빈볼을 지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 역시도 ‘진실’은 알 수 없으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당시의 빈볼 사건은 김성근 감독의 지시라고 믿고 있다. 머리 쪽을 향한 하나의 위협구가 가져오는 ‘실리적 효과’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조성환을 맞춘 채병용의 투구가 고의적인 빈볼일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나빴다. 정반대의 팀 컬러 때문에 경기장 안팎에서 보이지 않는 알력싸움을 펼쳐왔던 롯데와의 경기였고, 게다가 공을 맞은 당사자는 주장인 조성환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가슴에는 SK 로고가 새겨져 있다.
롯데 선수단 입장에서는 고의성 여부를 떠나, 맞은 부위와 부상 정도, 그리고 하필이면 그 상대가 SK라는 점에서 더욱 분개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교통사고는 ‘고의’가 아닌 ‘실수’로 일어난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도 참혹하며, 운전자는 실수로 인한 사고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진다. 고의가 아니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용서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채병용의 몸에 맞는 공도 마찬가지다. 고의성 여부를 떠나 그 결과는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투수라는 포지션은 적어도 상대 타자의 머리를 향하는 투구에 대해서만큼은 고의성과 관계없이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보복성 위협구를 던진 김일엽을 향해 ‘잘했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그 한 번의 위협구가 ‘필요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너도 당해봐라’라는 뜻이 아니라,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뜻에서 말이다.
조성환 선수의 쾌차를 빌며 글을 마친다. 제발 아무런 후유증 없이 거뜬이 복귀하길...
사족 1. - 심판의 다소 안일한 대응도 단단히 한 몫 했다. 아무리 채병용이 모자를 벗고 머리 숙여 미안함을 표시했다고 하더라도, 일단 공이 머리에 맞은 상황이었다. 고의성 여부를 떠나 공이 상대 타자의 머리에 맞은 경우네는, 심판의 재량으로 퇴장을 명할 수 있다. 채병용을 퇴장시켰다면 이후의 상황은 조금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채병용은 ‘퇴장’이 아니라 ‘교체’가 됐다. 이후 벤치 클리어링의 원인이 된 김일엽과 박재홍에게도 퇴장 명령은 나오지 않았다. 둘은 경고를 받았을 뿐이고 박재홍은 교체, 김일엽은 계속해서 던졌다.
사족 2. - 대체 언제쯤 타 구단 야구팬들은 SK의 우승에 진심으로 박수를 쳐줄 수 있게 될까.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올해 SK가 3연패를 달성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또 다시 ‘그들만의 잔치’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더러운 야구’라는 오명을 벗어 던지고, 만인에게 인정받는 진정한 챔피언의 인상을 심어주길 진심으로 기대한다.